국립서울현충원 경찰충혼탑
국립서울현충원 경찰충혼탑

서편 묘역 초입의 제1, 2묘역을 지나서 길을 따라서 올라가면 오른편에 청동색 경찰충혼탑이 서 있고, 그 아래에 경찰묘역이 들어서 있다. 전사, 순직한 경찰관 839위가 안장되어 있다. 6.25사변 이전 전사자 69위, 6.25전사자 439위, 그 이후 순직자 329위 등이다. 경찰충혼탑 하단에는 경찰 활동의 상징인 신, 의, 용의 3인상을 세워서 경찰의 충성과 봉사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기안에 새겨진 헌시의 마지막 부분이다.

“육신은 풀밭에 이슬처럼 잠깐 왔다 갔을지라도 뜻과 이름 길이 여기 살아계시니 강산과 역사와 함께 길이 사시니”

경찰관은 6.25사변 이전에 이미 공산 폭동과 남하 게릴라들과 싸우다 1,332명이 희생되었다. 6.25사변 중에는 10,618명이 전사 또는 순직했다. 전체 경찰관의 3분의 1로, 육군 다음으로 희생이 많았다. 6.25 당시 경찰은 산업시설과 주민들을 보호하는 일이 주된 임무였지만 전투 임무를 수행했다. 중요한 길목에서 적의 남하를 저지하거나 산간지대 등에서 공비토벌 작전에 참가하였다. 일부 경찰은 낙동강 전선과 대구 수호에 목숨을 맡겼고, 유엔군에 배속되어 북진하여 장진호 전투 등에도 참가하였다.

경찰은 개전 초 개성, 춘천 등 전방 곳곳에서 격전을 벌였다. 6.25 사변 최초의 전사자는 강릉경찰서 동명해안 초소에 근무하던 전대욱 경사이다. 같은 날 개성 철도 경찰대 소속 감봉룡 경감 등 43명의 대원들이 사수하다가 전사하였다.

낙동강 전선에서는 대구 수호를 외치는 조병옥 장관의 지시에 따라 1만 5천 명의 경찰이 치열한 전투 끝에 197명이 전사하였다. 서부 전선 함안지구에서는 미군과 전남, 전북, 경남 3개 도의 경찰 6,800명이 북한군 4개 사단에 맞서서 방어선을 지켜냈다. 전남지역에서는 청산도, 완도, 백운산 등지에서 공산군과 유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유엔군에 배속된 300명의 경찰은 정예 훈련을 받고 국립경찰 화랑부대라는 이름으로 인천상륙작전과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하고 계속 북진하였다.

미 해병 1사단 5연대 3대대에 배속된 40여 명의 화랑부대는 1950년 12월 초 장진호 서쪽의 유담리에서 미군이 중공군의 3겹줄 공세를 저지하고 하갈우리로 이동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당시 미 해병 대대장 로이스의 증언이다. “화랑부대는 수없이 몰려오는 중공군을 향해 위압적인 기관총을 발사하며 흔들리지 않았다.”

새벽에 적이 물러가고 적의 시신을 세어보니 화랑부대에서 200명이 넘게 죽었다. 화랑부대는 전사 4명, 부상 11명의 희생이 있었지만, 대대본부로 몰려오는 적의 예봉을 꺾었고 적을 물리쳤다. 경찰청의 경찰 인물 열전에 소개된 구국 경찰 31명 가운데 18명이 화랑부대 출신이다. 김정득 경위는 단신으로 중공군 18명을 사살하여 ‘흥남철수작전 영웅’으로 불리며 1954년 화랑 무공훈장과 1959년 미국 동성훈장을 받았다. 화랑부대 전사자 가운데 박은택, 이상길, 전병중(이상 경사), 우홍섭 순경은 서울 현충원에 위패로 봉안되어 있다. 경찰관 묘역(제5, 8, 9)에는 6.25때 전사한 분들이 안장되어 있다. 호국 인물로 선정된 김해수, 노종해, 조광묵, 주순철(이상 경감), 석상익 경위가 안장되어 있다.

호국 경찰, 군경이라는 말은 외국에는 없는 말이다. 경찰관은 기본적으로 지역 사회에서 주민과 주요시설을 보호하는 것이 주 임무지만, 북한 공산군들이 남한 정부 수립을 방해하며 수 없이 국지전을 일으키고 6.25사변으로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자 국가 수호에 앞장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 차일혁 경무관은 1950년 전투 경찰대 제2연대장으로서, 지리산의 사찰 곳곳에 숨어있는 공비 토벌을 위해 사찰 및 암자 소각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문짝만 떼어내어 소각함으로써 화엄사 등을 지켜내고 민간인을 보호했다고 한다.

1949년 6월 17일 경북 봉화경찰서 지용호, 서장근은 공비들이 나타나서 재산 면사무소와 지서를 점거하고 살인과 방화를 저지르고 있다는 전보를 입수하고, 경찰관과 대한청년단 40명으로 토벌대를 편성하여 출동했다. 전투 중 7명이 전사하고 전원 몰살당할 위기가 오자 지용호 서장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이들은 나의 명령으로 여기에 왔다. 나만 죽여라’고 하며 토벌대 30여 명의 목숨을 구하고 자신은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이범희 목사
이범희 목사

전라북도 경찰국 18대대 소속 김정자 순경은 1952년 9월 임실, 덕치, 가곡리 뒷산에서 교전 중 전사했다. 꽃다운 나이, 스무 살 여성이었다. 이처럼 6.25사변을 전후하여 경찰관의 역할은 치안 활동에만 그치지 않았다. 전투경찰로서 군인이나 다름이 없었고 여성 경찰로 편성된 전투부대도 있었다. 10월은 국군의 날(1일)과 경찰의 날(21일)이 함께 있는 달이다. 경찰 제복을 입고 최전선에서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조국에 바친 호국 경찰관들을 가슴에 새겨보자.

이범희 목사(6.25역사기억연대 부대표, 6.25역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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