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의과대학 증원에 반발해 지난 2월 전공의들이 집단 사직한 이후 주요 대학병원을 떠난 전문의가 2천7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1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한지아 의원이 보건복지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의하면 올해 2월부터 8월까지 의대 40곳의 수련병원 88곳에서 사직한 전문의만 2천757명으로 보고됐다. 의·정 갈등이 장기화하면서 애꿎은 국민 피해만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전문의는 의사 면허를 취득한 뒤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특정 진료과목의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의사를 통칭한다. 병원 내에서 전공의를 가르치는 교수와 전공의 자격시험을 통과한 전임의 등이 이에 해당한다. 전문의들이 병원을 사직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올 2월 전공의들이 떠난 공백을 전문의들이 채우게 되면서 그에 따른 과로가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전공의들이 수련병원을 떠나면서 내년 초 전문의 자격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전공의 수가 예년의 5분에 1로 줄었다고 한다.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이 결과적으로 전문의마저 줄어들게 하는 역작용을 낳게 된 것이다. 그동안 대형 병원 일부가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전임의를 채용해 전공의가 떠난 자리를 대신하게 했는데 새로 배출할 전문의가 대폭 줄면 전임의 충원조차 어려워져 의료 공백 장기화가 불 보듯 뻔하다.

의·정 갈등으로 인한 의료 공백 사태는 전공의들이 수련병원을 떠나면서 일찍이 예견된 일이다. 전공의의 빈 자리를 한동안 전문의와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전임의를 채용해 메웠으나 이제 전문의까지 줄지어 사직하면서 더는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국민은 정말 병원 갈 일이 생기지 않도록 각자 몸조심하는 길밖에 없게 된 것이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도록 정부와 의사단체는 아직도 네 탓 공방을 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의 의료 공백 사태가 누구 탓이나 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는 데 있다. 특히 필수 의료과목 전문의 수급에 빨간불이 켜졌는데 대책은 뒷전이고 아직도 책임 공방이나 하고 있으니 이런 답답한 노릇이 어디 있나.

이대로라면 의·정 갈등의 골은 점점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의사 수를 늘려야 한다는 정부의 계획도 시간이 갈수록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여야 정치권이 보다못해 여·야·의·정 협의체를 만들었으나 의사단체가 정부가 의대 증원 포기하지 않는 한 참여하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어 갈등의 불씨가 꺼질 기미가 안 보인다.

의대 증원을 고집하는 정부나 무조건 의대 증원 계획을 포기하라고 정부를 윽박지르며 단체 행동에 들어간 의사단체나 각자 할 말이 많아 보인다. 정부는 지금도 의사 수 부족으로 국민이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있다며 내년부터 의대 증원을 2000명 늘려도 부족하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의료계는 정부의 저수가 정책이 의료기관 경영 악화와 필수 의료분야 공백과 편중 현상을 초래한 근본 원인이라며 이를 개선하는 게 먼저다 라는 입장이다.

그런데 국민 입장에선 이런 의·정 간의 입장 차를 이해하고 원만하게 해결되는 날까지 모든 걸 감수하고 기다리기엔 당장 겪어야 할 현실이 너무나 참담하다. 당장 내가, 내 가족이 큰 수술을 해야 하는데 병원에 의사가 없어서 정처 없이 떠돌아야 한다면 누가 그런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나. 결국, 의·정 갈등으로 국민 피해가 가중되는 현실은 의·정 모두를 패자로 만들 뿐이다.

이럴 때 반드시 필요한 게 중재 노력인데 정치 원로들도, 종교계도 어느 때부턴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의·정 갈등 초기에 저마다 성명서를 내 국민의 걱정 어린 목소리를 대변했던 교계마저 손을 놓고 관망하는 듯한 자세는 바람직하다 할 수 없다.

정부와 의료계가 마치 마주 달리는 기관차처럼 폭주하는 상황에서 종교계가 나선다고 누가 말을 듣겠나 하는 회의감과 무력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손을 놓고 관망하는 자세는 사회 갈등을 해소해야 할 종교의 사명과 동떨어졌다. 이럴 때 지도자들이 신앙의 관점에서 허심탄회하게 중재에 나선다면 복잡하게 꼬인 실타래가 의외로 쉽게 풀릴지도 모른다.

난관에 부딪혀 출범조차 하지 못했던 여·야·의·정 협의체에 대한의학회와 의대·의전원협회가 참여키로 하면서 숨통이 트이게 된 건 천만다행이다. 다만 법정 단체인 의사협회가 불참 의사를 고수하고 있는 건 여전히 걸림돌이다.

반대한다고 대화마저 거부하는 건 올바른 자세라 할 수 없다. 전쟁 중에도 대화는 필요한 법이다. 이대로 반목하다간 어렵게 이룩한 선진 의료 시스템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의료개혁이 물거품이 될 뿐 아니라 의사들이 설 자리도 잃게 될 것이다. 정부와 의료계 모두 대승적인 자세로 대화 테이블에 나와 하나씩 문제를 풀어나가게 되기를 바란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