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욱 교수
신성욱 교수

누가 쓴 글을 하나 읽었다. 그냥 공감이 갔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다 한두 번은 느껴보았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최소한 한 번쯤은 경험해본 바가 있었다. 이런 글이 독자들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는다. 특히 현재 그 글의 내용과 같은 심정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더욱 그 내용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그 글을 여기 소개해보자.

“살아간다는 게 정말 쉽지 않다. 내가 바라는 대로만 되지 않고, 예측한 범위 안에서만 일이 일어나지도 않는다. 가끔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다 내려놓고 싶고, 그러다가 나의 나약함에 질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뭐든 잘 되면 얼마나 좋을까? 선하게 살려고 애를 쓰는데 악인으로 오해받는 경우도 있고, 꾀 부리지 않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는데, 편법이나 불의한 일로 자기보다 앞서가는 경우도 보게 된다. 이럴 때 사람은 힘이 쑥 빠지게 된다. 잘 살아볼 용기가 꺾이는 걸 경험하게 된다. 최악의 경우엔 모든 것 다 내려놓고 생을 떠나고 싶은 유혹도 받게 된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류시화 시인의 시가 생각났다.

“나무에 앉은 새는 가지가 부러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는 나무가 아니라 자신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다.”

역시 시인의 눈은 예리하다. 시인도 그냥 시인이 아니라 독자층이 두터운 인기 시인의 눈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새는 두 발을 지탱하고 있는 나무를 믿기보다 자신의 날개를 믿기 때문에 염려나 두려움을 가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말이 사실인지 알아보기 위해 새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다. 그 시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어떤 교훈을 준단 말일까? ‘새보다 못한 인간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설마 사람이 새보다 못한 존재라 생각하는 이는 없을 게다. 하지만 사람이 새보다 낫기 때문에 걱정거리들이 훨씬 많음도 인정해야 한다. 피조물 가운데 ‘염려, 두려움, 의심’이 가장 많은 존재가 사람 아니던가.

게다가 짐승에겐 날개가 있지만, 우리에겐 날개가 없다. 믿는 구석이 무너지면 날개 없는 사람은 한없이 추락하게 된다.

‘날개 없는 짐승’, 그게 바로 사람이다. 사자나 호랑이처럼 살생이 가능한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도 사람에겐 없다. 진화론자들이 우리의 조상이라는 고릴라나 원숭이보다 힘이 세지 않다. 그럼에도 걱정과 염려와 두려움은 제일 많은 존재가 사람이다.

누구보다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유명 여류 작가에게 뜻하지 않는 슬픔이 찾아온다. 사랑하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 사후 3개월 만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자식이 죽는 또 다른 절망이 찾아온다. 죄 많은 악인이 아니라, 노벨문학상을 수상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선한 영향을 많이 끼친 작가다. 살아온 내용에 적합하지 않은 결과가 찾아올 때 사람은 절망하게 되고 불평이 터져 나오게 된다. 오죽했으면 그녀가 믿는 신에게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 절규했을까? 그게 사람이고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생을 살아가면서 이유도 모른 채 마시게 되는 쓴 잔이 적지 않음을 경험한다. 그래서 두렵고 속상한 것이며, 그 땜에 모든 것 내려놓고 훌쩍 떠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런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비관주의자나 염세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성경 욥기서에 나오는 욥을 보라. 하루아침에 그 많던 재산이 다 날아가 버리고, 열 명이나 되는 자녀들마저 세상을 떠나버린다. 게다가 자기 몸에는 견딜 수 없는 악창까지 생겨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기 신세를 한탄하거나 절망과 불평 속에 빠지지 않을 이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욥은 그런 일들로 인해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인 마음을 갖지 않는다. 이유가 뭘까? 하나님을 아주 많이 경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자기를 창조하시고 많은 재산과 자녀를 주신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정도로는 시험에 들지 않았다. 물론 나중에 가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했음을 고백하며 회개했지만 말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하나님이 계시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형질이 갖추어지기 전에 우리를 다 아시고(시 139:16), 우리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해놓으신 분이시다. 그분을 끝까지 신뢰하기만 하면 어떤 일이 닥친다 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비록 내 몸에 날 보호해줄 수 있는 날개나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이나 강력한 힘이 없다 하더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최고의 요새요 방패가 있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 말이다. 그분으로 인해 우리는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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