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학도의용군 묘역을 나와서 정문 방향으로 향하면 왼편에 세 개의 작은 아치 모양의 학도의용군무명용사탑이 보인다. 1950년 8월 포항여중 전투에서 전사하여 부근에 가매장되었던 이름을 모르는 학도병 48명의 유골을 수습하여 모신 곳이다. 뒷면에 ‘여기에 겨레의 영광인 한국의 무명용사가 잠 드시다’라고 새겨져 있다.
학도의용군은 1950년 6월 29일 수원에서 결성된 비상학도대로부터 시작되었다. 전황의 악화로 대구에 집결한 학도병은 7월 19일 대한학도의용대로 개편되었다. 학도의용군은 1951년 2월 28월 학교 복귀령이 내려질 때까지 27,700명이 전투에 참가하였고, 후방 선무활동에 약 25만 명이 참가하였다.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살아서 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1950년 8월 10월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 이우근 학도병이 쓴 편지의 한 부분이다. 이 학도병은 다음날 포항여중 전투에서 전사하여 부치지 못한 편지가 되었다.
포항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에는 포항여중, 안강, 형산강, 천마산전투 중에서 전사한 학도병 1,394명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8월 11일 학도의용군 71명은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을 제지하기 위하여 포항여중에서 11시간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4차례 근접전에서 전사 48명, 행불 4명, 포로 13명, 부상 6명 등의 희생자를 냈지만,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함으로써 700여 척의 선박으로 시민들이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었다. 학도의용군의 활약은 안강, 천마산, 형산강, 장사리 등으로 이어졌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양동작전으로 개시된 영덕, 장사상륙작전은 육군본부 직할 제1유격대(대장 이명흠 대위의 이름을 따서 ‘명부대’라 했다)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학도병들이 참가한 6일간의 전투에서 772명 중 129명이 전사하고 110명이 부상당했다.
학도병 최초의 전투는 1950년 7월 25일 하동 화개전투였다. 여수, 순천, 광양, 보성, 고흥, 강진 등 17개 중학교 183명의 학생들이 순천의 국군 15연대에 자원입대하였다. 학도병들은 진주로 향하던 북한군 6사단 1천여 명과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12시간의 사투 끝에 70여 명이 전사하고 실종되었다.
1950년 8월 진해중학교 207명이 자원입대하여 단기교육을 받고 현역병으로 편입되어 13명이 전사했다. 제주농고 145명은 제주도 학도돌격대를 조직하여 해병대에 입대하였다. 양동식 해병은 1950년 8월 15세에 해병4기로 자원입대하여 인천상륙작전과 수도탈환작전, 고성, 간성, 영덕, 영월, 지리산, 도솔산 924고지에서 활약하고 을지, 화랑, 충무무공훈장과 미국 동성무공훈장까지 4개의 훈장으로 다음과 같은 아버지의 기도에 답했다. ‘이 나아감에 대한의 일으켜 세움이 있으니 나에게 기쁜 개선의 노래를 듣게 해다오.’
여학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각 군에서 간호, 취사, 세탁, 통신, 후방선무활동을 주로 했지만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 강릉사범학교 여학생 31명이 제1사단에 입대하였고 강릉여중 20여 명이 제3사단과 함께 함흥까지 진격했다. 1950년 9월 여군의 모태가 된 여자의용군 교육대가 창설되었다. 해군과 공군에도 여자학도 의용군이 있었다. 해병대 인천상륙작전에 투입하기 위해서 모집한 3천여 명의 대원 중 대다수가 학생이었고 그중에 126명이 여학생이었다. 공군에 자원입대한 42명의 여성항공병도 있었다.
우리 역사에는 의병의 전통이 있다. 6.25전쟁 당시 27,000여 명의 학생이 교복을 입은 채로 자진 참전하여 7,000여 명이 전사했다. 정태영 장군은 6.25 직후 학도병으로 출정하여 1952년 육군소위로 현지 임관했다. 전후 월남전에 참전하였고 제7사단 포병사령관을 역임했다. 학도병 출신의 유일한 장군이며 장군 제1묘역에 묘소가 있다.
최갑석 장군은 1947년 이등병으로 입대하여 1950년 육군소위로 현지 임관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고 제8사단장, 제2군 부사령관을 역임하고 예편했다. 그의 이름이 붙은 대대가 있을 정도로 국군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문화관 대강당 벽면에 재학생으로 6.25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한 29명의 이름이 적힌 검은색 명판이 있다. 실제는 100여 명이 전사했지만 기록 확인이 어렵다고 한다. 영국의 옥스퍼드대 2,726명, 케임브리지대 2,470명이 1차 대전 때 전사했다. 재학생의 18%이다. 이튼칼리지 1,905명을 비롯해 미국의 예일, 프린스턴, 메사추세츠 공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피난지 부산에서도 강의를 중단하지 않을 정도로 고급인력을 보존한다는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841명의 병력을 실은 문산호는 악천후와 적의 집중공격을 뚫고 임무를 완수하고 장사 앞바다에 수장되고 말았다. 수많은 학도병의 희생으로 양동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다.
미국 버지니아 루레이 동굴 가장 깊은 곳에 명비가 세워져 있다. 에머슨의 시 ‘자원병’의 한 소절과 이곳 출신의 제 1,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전사자 7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영광은 흙먼지 가까이에 있고 하나님은 인간과 가까이에 계신다./의무의 낮은 속삭임에도 그대들 젊음이 응당 그러하듯이 할 수 있다고 대립해야 한다.’
국립묘지에는 이처럼 나라가 사라지는 위기 앞에서 책 대신 총을 들고 전선으로 달려간, 미처 피워보지도 못하고 가라앉은 어린 학도병들의 묘비지가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그들의 목숨으로 구조된 사람들이다. 최소한 이분들이 목숨 바쳐 지켜낸 국가정체성을 이어가야 한다.
이범희 목사(6.25역사기억연대 부대표, 6.25역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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