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 로이(רֹעִי)’, 일반적으로 이렇게 신앙고백을 할 때 금방 연상되는 분위기는 목가적, 전원적 분위기다. 그러나 성경에서 목자와 양의 비유를 사용할 때의 분위기는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니다. 구약에서의 목자는 대부분 왕이었는데 왕은 백성들의 생존을 책임져야 했다. 또 외부 침략이나 경제적인 위기 때는 앞장서서 현장에서 상황을 지휘하고 싸우며 치열하게 헤쳐나가야 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나는 선한 목자라”(11절, Ἐγώ εἰμι ὁ ποιμὴν ὁ καλός),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신다. 요한복음에서 일곱 번에 걸쳐 자신의 신적 권위를 스스로 표현하신 것 중 하나다. ‘나는 선한 목자’, 헬라어 원문의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영어로 I am을 사용하셨다. 이 표현은 원래 광야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יהוה)라고 말씀하실 때의 바로 그 표현이다.
자신이 하나님이 세우신 목자와 양의 문이라고 하실 때 도둑과 강도에 대비하신 것처럼 삯꾼 목자에 대비해서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신다. 9장의 맹인이었던 사람을 끝까지 이용하려는 영적 소경인 악한 목자, 삯꾼과 대비되는 존재라는 선언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어떤 분이신가?
자기 양을 아신다
‘선한 목자’라는 선언은 에스겔 34장을 배경으로 한 말씀이다. 의롭지 못한 목자들이 도적질 당하고 노략질당하는 양들을 방치하여 온 땅에 흩어지게 된 것을 개탄하며 친히 선한 목자가 되신다는 말씀, 예언된 말씀처럼 예수님은 디아스포라 세계에 흩어져 유리방황하는 양떼에게 다윗처럼 “내가 바로 에스겔 34장의 그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신다.
‘선하다’라는 말은 ‘칼로스’(καλός), 기술면에서 선하고 성품이 선하다는 것, 목자 역할 잘하고, 양을 사랑하는 목자라는 뜻이다. 9장의 맹인이었던 사람을 끝까지 이용하다가 더 이상 이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를 출교시켜 버렸다. 그래서 막막해진 처지에 놓인 그 사람을 예수님이 선한 목자로서 찾아가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를 위해 자신을 내놓으셨다. 자신을 죽이고 싶은 사람들 앞에 스스로 나서신 것이다.
선한 목자, 자기 양의 모든 것을 알고 책임지기 위해 오셨다. 이게 중요하다. 가족공동체나 교회공동체에서 같이 책임지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예수님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신사 숙녀 여러분” 그렇게 남기를 원치 않으셨다.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를 알고 서로 알아야 한다(4절, 27절).
무디(D. L. Moody)의 설교집에 목자가 모든 양들을 각각의 이름으로 불러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한 방문객이 목자에게 직접 가서 진짜인지 확인했다는 이야기가 소개된다. 목자가 한 양의 이름을 불렀더니 다른 양들은 다 그냥 풀을 뜯고 있는데 한 마리가 고개를 들고 바라보더란다. 목자는 같은 방식으로 12마리를 불러내서 이를 본 방문자가 “당신은 어떻게 양들을 분간하시나요? 다 똑같아 보이는데.” 그랬더니 목자는 자기 양들 중에 흠이 없는 양은 한 마리도 없기 때문에 각각의 결점으로 양을 다 구분할 수 있다고 했다는 거다.
목자는 방문객에게 어떤 낯선 사람도 양을 속일 순 없다고 하자 호기심 많은 방문객은 그 목자의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들고 양떼에게 가서 목자의 목소리를 흉내내 보았지만 양떼 중 단 한 마리도 그를 따라오지 않더란다. 그때 목자가 “간혹 따라가는 양이 있는데 그 양은 건강이 좋지 않은 양”이라고 했단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믿음이 병들고 약해지면 찾아오는 아무 선생을 따라간다. 어쩌면 어려운 일들을 겪을 때 예수께서 부드러운 목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 힘든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해서 그게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다는 증거일 수는 없다. 예수님은 우리는 아신다. 우리 처지와 형편을 아신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아무리 신학에 조예가 깊어도 예수께서 모른다고 하시면 그 사람은 예수께 속한 양이 아닐 것이다(마7:22, 23).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께서 양들을 아시는 것을 ‘승인하다’로 번역하고, 양들이 주님을 아는 것은 ‘신앙을 고백하다’라는 의미를 담아 ‘알려지다’로 번역했다. 예수님이 우리를 아시는 것은 승인의 의미를 지니고,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것은 고백적인 의미를 반영해 번역한 것이다.
양은 목자에게 사랑만 받는 가축이 아니다. 양은 목자에게 여러 가지 유익한 것을 제공한다. 젖도 주고 털도 주고 고기도 준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자기를 위해 희생하고 각양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과 그 나라를 위해 자기 것을 희생하는 것을 기뻐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지각을 주셔서 주님 자신을 알게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요 영생이심을 깨닫는다(요일5:20). 사도 바울처럼 주님의 양 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알아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님만 믿고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빌3:8).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다
오래전 어느 기업 신입사원 선발 시험에 아주 재미있는 문제가 출제되었다. 이런 문제였다. “당신이 폭우가 쏟아지는 어느 날 밤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비가 많이 쏟아지는 외진 곳의 버스 정류장을 지나가는데 그 정류장에 세 사람이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떨고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고, 당신은 그중 단 한 사람만 태우고 갈 수 있다면 다음 세 사람 중에 누구를 태우겠나? 첫째는 노인, 깊은 병중에 있는 분이다. 몸을 덜덜 떨며 병원 가려고 서 있으시다. 둘째는 얼마 전에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을 받고 죽을 뻔했는데 자기를 살려준 고마운 의사 선생이시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한평생 마음에 그리던 이상형의 예쁜 여자다.”
자유 토론을 시켰는데 수험생들은 앞다투어 자기 의견을 말한다. 그들의 주장을 보면 노인은 모시고 가는 도중에 돌아가실 수도 있기에 부담이 너무 커서 태우기 어렵고, 의사는 다음에 신세 갚을 날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기회가 있겠지만 절세미인을 놓칠 수는 없다는 생각들이었다. 200명의 생각이 비슷했는데 단 한 사람만 생각이 달랐다. 그는 명답을 말했다. “자동차 열쇠를 의사에게 주고, 노인을 태워서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하라고 말한 후 자기는 그 절세미인과 함께 버스를 기다리겠다.” 지혜로운 대답 아닌가?
그런데 세상만사에 다 이런 명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다 얻을 수 없다면 버릴 건 버려야 한다.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어찌보면 하찮은 양, 심하게 말하면 얼마 후에 잡아먹을 양, 몇 푼 되지도 않는다. 희생할 가치가 없다. 그런데 그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 선한 목자일까? 멍청한 목자일까?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기꺼이 바보를 자청하신다. 선한 목자라 거듭 목숨을 버린다고 하신다(11, 15절).
자발적으로 희생적인 죽음을 택한다는 말씀, 요한복음에서 자주 언급될 만큼(17,18절) 예수께서 양들과 생명적 결탁 관계의 목자라는 말씀이다.
선한 목자의 관심은 오직 양이다. 야숙하는 들판에서 임시 우리를 준비하는 것도, 또 돌로 벽을 쌓아서 요새 같은 우리를 만드는 것도, 비바람을 피하기 위하여 지붕을 덮고, 아침 저녁 문 곁에 서서 양의 수를 확인하는 것도, 모자라면 길 잃은 양을 찾아다니는 것도 다 관심, 양을 너무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게 단순한 직업의식일까? 아니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잃었던 한 마리의 양을 되찾는 감격!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오며 “찾았다” 외치며 돌아와 동네 사람들과 잔치하는 그 기쁨! 재밌는 것은 잔치하면서 양을 잡아먹는다는 거다. 한 마리 찾고 몇 마리 잡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게 사랑이다. 너무 계산하지 말라. 현대인은 너무 타산적이다. 계산하다 망친다. 좀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예수님은 사랑하기 때문에, 얻기 위해 버리셨다. 그분의 마음에는 오직 아픈 양, 병든 양, 잃어버린 양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유대교 전승을 기록한 미쉬나(Mishna)에 의하면 임금을 받고 양을 치는 목자, 곧 삯군 목자는 책임 한계가 이리 한 마리의 공격으로 제한되어 있다. 한 마리의 이리가 양들을 공격하는 경우 삯군 목자는 그 공격으로부터 양들을 보호해야 하지만, 두 마리 이상의 이리들이 양들을 공격해오면 자신의 안전을 위해 도망쳐도 된다는 것이다.
삯군과 선한 목자, 평소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위험이 닥치면 선명하게 구분된다. 삯군은 이리떼의 습격에 도망치지만 선한 목자는 이리떼와 끝까지 싸우며 때로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러니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는커녕 자기들 입장만 생각하는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선한 목자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자기들의 포지션, 자기 이권에만 관심이 있었다. 심지어 성전보다 성전의 금, 그리고 제단보다 그 위의 제물에 더 큰 비중을 둔 사람들이었다(마23:16-19). 목자로 보냈는데 삯꾼 노릇하고, 부모인데 마치 고아원 원장처럼, 보모처럼 한다는 것이다.
사십이 넘은 아들이 교회 가기 싫어 미치겠다며 칠십이 넘은 어머니와 주일 아침부터 실갱이를 한다. “정말 교회 가기 싫다니까요.” 어머니가 도대체 왜 그러느냐며 통사정을 하자, 마지못한 아들이 교회 가기 싫은 이유를 말한다. “첫째, 대표기도가 너무 길어서 참을 수가 없고, 둘째, 연습도 제대로 안 한 찬양을 부르고도 감동스런 표정으로 앉아 있는 찬양대 보는 일이 고역이고, 셋째, 나도 일요일엔 가끔 산에도 가고 싶고 늦잠도 자고 싶다”는 것이다.
아들의 말에 어머니가 딱하다는 듯이 잠시 생각하더니, “나도 네가 교회를 꼭 가야 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말해주겠다. 첫째, 예배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고, 둘째, 교회는 사람 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가는 곳이며, 셋째, 너는 담임목사잖아” 그랬단다.
주의 양무리를 치도록 위임받은 모든 분들이 비록 ‘그 선한 목자’일 수는 없지만,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본받아 주인 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양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버린 선한 목자이셨다.
오직 예수님뿐이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한 목자의 ‘선’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 자신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 희생제물이 되는 것이다. 창세 이래 인류의 죄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은 유일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모하메드 그분들 중 대속의 죽음을 죽은 분은 아무도 없다. 헬라와 로마의 철학자나 세기적인 역사의 영웅들 중에도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은 분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고 하셨다. 일반적으로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목자는 없다. 뜻하지 않게 목숨을 잃는 수는 있어도 양들을 위해 스스로 목숨까지 버리지는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 위기 가운데 놓인 양을 위해 목자가 죽게 되면 오히려 양 무리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죽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일반 목자를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나만, 나만 선한 목자다”라고 선언하신다. ‘나는 양의 문이라’라고 하신 것도 마찬가지, 사실은 ‘나만 양의 문’이라는 말씀이다. 다른 I am도 다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나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14:6)고 하셨다.
그래서 독선적이라는 비판을 받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유일성을 확신한 베드로는 감히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고 선언했다.
그리고 본문 속에 주목할 만한 예수님의 말씀이 또 있다. ‘우리에 들지 아니한 양’이 있다는 것이다(16절). 이방인, 예수 믿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을 받게 될 사람들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본래 이방인인 우리를 위한 선한 목자도 되신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지 모른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주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선한 목자 되신 주께서 우리를 지극한 정성으로 돌보시고 최선을 다해 지키신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핵심 진리인 십자가에 관해 말씀하신다(17-18절). 예수님은 십자가를 억지로 지지 않으셨다. 유다의 배반이나 종교지도자들의 음모, 빌라도의 사형 선고 때문에 할 수 없이 떠밀려서 지신 게 아니다. 순교자의 죽음이 아니라 대속의 죽음을 자발적으로 당하신 것, 그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Τετέλεσται)고 선언하셨다. 사도 요한은 90년대 성도들에게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도전한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한다. 그래야 생명을 얻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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