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글은 결코 누구를 비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신앙의 교리나 학문의 보편적 자연질서에 관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 최근 서울신학대학교와 소속 교단인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 그리고 이 대학교에 적을 둔 박영식 교수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문제가 해당 기관 내의 문제로 제한되거나 한 두 번의 언론 보도로 종식되지 않고, 오히려 문제가 점점 더 확대되면서 이제 기독교 전체의 현안으로 떠오르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권 안에 들어오고 말았다.
문제가 보도된 이후, 여러 기독교 매체와 채널을 통해 지속적으로 알려지고 있는 내용들을 살펴보면, 양 측의 주장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느낌이다. 나는 이분들과 아무런 면식도 없고, 따라서 직접 들은 바도 없으므로 보도된 내용으로 생각해 볼 뿐이다. 우선 박 교수 자신의 해명을 보면, 그는 유신진화론을 적극 지지하고 주창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부정하거나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훼손하는 일은 없어 보이고, 다만 신학자로서 열린 학문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과부적의 형세로, 그의 변론은 별로 힘을 얻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대척점에 있는 분들의 (언론에 보도된) 주장을 보면 안타깝게도 박 교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리고 반론이라기보다는 ‘유신진화론’에 대하여 각자가 지니고 있는 신념을, 고정관념에서 비롯한 일반론을 일방적으로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 삼자로 하여금 그런 인상을 갖게 한다면, 그 원인은 그 화자(話者)에게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몇 분의 개인적인 의견 혹은 무슨 단체의 이름으로 발표된 성명서들이 그러하다. 이러한 해결 방식은 박 교수의 문제점에 대한 정당한 반론이라 보기 어렵고, 해결코자 하는 관점이 서로 동떨어진 채 그냥 그대로 존속한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상처만 깊어간다.
나는 교리와 신학(신학에 대한 학문)은 두 개의 범주로 상호존중하고, 그 경계를 서로 지켜야 한다고 본다. 목회자(목사)와 신학자(신학교수)의 입장은 서로 다르다. 내 경우는 처음부터 목회자이자 신학자였다. 나는 내가 담임하는 교회나 노회 및 총회에서 교리의 범주를 철저히 지킨다. 하지만 신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에는 여러 학설을 다양하게 소개하고, 이것이 목회 현장에 적용될 때 자신이 어떻게 행위해야 할지를 분명히 가르친다. 교리(敎理)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그리스도인들이 잘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공교회가 정리한 지침서가 아닌가. 하지만 교리는 성경이 아니다. 다시 말해, 성경은 절대무오하지만, 교리는 차이성과 변화성을 지닌다. 장로교, 성결교, 감리교, 순복음교, 루터교 등 교파 사이에는 교리적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 사실 아닌가. 이를테면 80년대만 해도 ‘방언’을 하면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교단도 있었다. 따라서 목회자가 사역을 할 때에는 그 교단이 지향하는 교리를 (적어도 그 교단에 몸담고 있는 이상) 충실히 따라야 할 의무와 책임을 갖는다. 그 연장선상에서, 교단에 소속된 신학대학교(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교수할 때에는 교단이 지향하는 교리를 벗어나지 않도록 교수 자신과 학생들이 유의하는 것은 마땅하다. 이런 의미에서, 해당 신학대학교와 교단이 ‘유신진화론’에 대해 경계하고, 교단이 지향하는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조치를 취하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하겠다.
그런데 신학 내지 학문이라는 범주를 생각해 보자. 나는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말을 인용하고 싶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cogiti ergo sum.” 이 말은 ‘나’라는 존재가 단순히 사유하는 존재임을 말한 것이 아니라, 학문에 대한 자신의 자세와 태도를 강조한 것이다. 데카르트는, 모든 학문은 철저한 의심과 회의(懷疑)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고, 그의 역작 《제일철학에 대한 성찰》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변증과 신앙심으로 가득하다. 신학자가 하나님에 관한 학문을 함에 있어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의심하면서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 그리고 그분께서 창조하시고, 통치하시고, 심판하실 섭리와 계시와 역사(役事)에 대해 연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것을 교리의 잣대로 제단하고 침묵을 강요한다면, ‘학문’이란 것이 존재할 자리가 없게 된다. 그리고 역사 발전을 어떻게 도모할 수 있겠는가. 또 무소부재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 인간의 빈약한 두뇌로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신학에 있어 다양한 주장이 ‘학설(學說)’이란 이름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닌가. 신학자는 목회자와는 달리 사물을 보는 관점과 혜안 및 통찰에 있어 보다 더 자유하고 개방적이어야 한다. 물론 명백한 이단성은 당연히 배제하면서 말이다.
교단에 속한 신학대학교(신학교)는 이러한 사정들을 잘 조화시켜야 하지만,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안다. 두 마리의 토끼를 사정없이 잡으려고 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더없이 지혜가 필요하다. 목회와 신학(학문)의 범주를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며 잘 해결되기를 기원하는 수밖에 없겠다. 모두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 그리고 그분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에 속한 백성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신실한 믿음과 충정에서 나온 선한 논쟁이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총을 더하여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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