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근 목사의 일갈 “정통이 밥통이냐?”
1950년 6.25 한국전쟁 중 북한군에 납북되어 끌려가서 순교하신 송창근 목사께서 1940년대 대한예수교장로회 안에서 일고 있던 정통 보수신학계 신학자들과 진보신학계 신학자들 두 진영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비생산적 교리 논쟁에 대하여 일침을 가한 유명한 말씀이 있었다: “정통이 밥통이냐?”
최근 한국 신학계에서 발생한 언론 소식을 보면, 서울신학대학교 박영식 교수의 ‘창조신학’에 대하여 성결교단과 대학 행정당국이 신학검증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외부 신학자로서 동 검증위원의 한 사람으로 위촉받은 김영한 교수의 비판에 대하여 당사자 박영식 교수가 공개토론을 제안하였다는 소식이 들린다. 두 신학자의 논쟁에 칼럼자가 끼어들어 시시비비를 말하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건전한 보수정통신학자로서 학문성과 전문성을 갖춘 김 교수의 비판적 관점에 맘이 걸린다. 비판의 초점은 박 교수의 ‘창조신학’은 과학적 진화론과 기독교 창조신앙을 혼합한 ‘유신진화론’ 형태라고 판단하고, ‘유신진화론’은 창조사건의 역사성과 기독교 원죄설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김영한 교수가 한국의 소위 ‘창조과학’을 지지하는 입장인지 아닌지 칼럼자는 확인할 길도 없다.
문제는, 주일날 헌금 준비하고 묵묵히 교회에 출석하면서 오늘 욕 많이 먹는 한국교회를 지켜가는 선량한 신도들에게는 위에서 언급한 ‘창조신학’과 ‘창조과학’의 근본적 차이가 생경하고 관심도 없다는 점이다. 두 입장은 모두 4개 글자로 압축된 신학적 전문용어로서 실로 큰 차이를 지닌 신학적 어휘임에도 불구하고, 표현 자체만 가지고 논한다면 신자들에게 큰 관심을 받기 어렵다. 기독교 신앙의 생명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특히 사회적 약자들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데 있는 것이지 어떤 정통신학에 사활이 달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신학은 제아무리 초월적 실재 차원을 다룬다고 해도 하나의 열려있는 인간적 학문일 뿐이다.
칼럼자가 오늘 이 글에서 호소하려는 점은, 나를 포함하여 모든 한국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제발 “경직된 정통신학에서 역동적 갈릴리 복음에로!”라는 일대 전환, 근본적 지향성 변경, 심령적 회심을 단행해야 할 긴박한 시대 상황임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물론 신학의 역할과 기능도 중요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학자와 목회자가 일편단심 바쳐야 할 관심과 충성 대상은 예수께서 보이신 정의와 사랑과 평화와 생명의 육화체(肉化體)인 ‘갈릴리 복음’인 것이지, 어느 특정 시대 형성된 정통신학 교리들(Doctrines)이거나 교의(Dogma)가 아닌 것이다.
실체론적 사유에서 생성론적 사유에로의 전환이 현대 시대사조의 핵심
위에서 필자가 강조하는 “정통신학에서 갈릴리 복음에로!” 일대 전환의 긴박성을 일반인들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실체론적(實體論적) 사유에서 생성론적(生成論적) 사유에로!”의 전환이라고 압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좀 딱딱한 말이지만 ‘실체’라는 말은 하느님, 인간, 동식물, 분자와 원자를 막론하고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이, 스스로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불변하는 어떤 ‘본질’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신념인 것이다.
하나님에겐 불변하는 신성, 인간에겐 인간성, 동식물과 물질에게는 그것이게 하는 어떤 동일성, 항구성, 불변성, 특성이 있다는 본질주의(essentialism) 철학 사조가 강조하는 점이 ‘실체’ 개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스스로 있는 자” 곧 신만이 실체적 존재인 것이고, 다른 것들은 우연적이고, 덧없는 것이고, 유한한 것이고,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것들이 필요한 존재자들이다.
위에서 언급한 실체론적 사유체계가 헬라 철학 전통에 뿌리를 둔 서양철학과 교부 시대 이후로 그 영향을 크게 받은 주류적 기독교의 실재관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시대사조 곧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특징은 실체론적 사유체계를 혁신하여 생성론적 사유체계를 강조하는 데 있다.
생성론적 사유(生成論的 思惟)의 특징은 글자 그대로 삼라만유를 생성되어가는 과정, 새로운 것이 창발되는 창조적 운동, 반복이나 순환이 아닌 경험들의 ‘누적적 성숙’(累積的 成熟) 과정으로 파악하는 실재관이라는 점에 있다. 과거 전통(傳統) 혹은 정통(正統)이 중요하지만, 그것들은 완결된 그 무엇으로서 권위를 부리며 진리의 심판관으로서 고정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퇴비처럼 삭아서 현재 속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주는 것일 뿐이라고 본다. 이러한 생성론적 사유의 창조적 사상가들의 대표적 인물을 들라면, 19세기 후반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셸링, 딜타이,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등 대표적 사상가들을 거명할 수 있을 것이다.
칼럼자가 이 글에서 현대 철학 사조의 큰 흐름을 언급하는 목적은,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신론, 구원론, 인간론, 창조론 등 신학적 사유체계가 플라톤-데카르트로 대표되는 ‘실체론적 사유’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고 아리스토텔레스-베르그송으로 대표되는 ‘생성론적 사유’에 경청하지 않아서 경직된 정통신학에 갇혀있지 않는가를 성찰하자는 것이다. 유기체적 인간공동체보다도 개인주의가 ‘자유민주주의’라는 미명 아래 강조되고 있고, 교회의 우주적 보편성보다는 개교회 중심주의가 강조되고 있고, 생태론적 여성신학의 동기보다는 가부장적 남성신학이 여전히 내면화되어 있지 않는지 정직하게 성찰하자는 것이다.
오늘 칼럼 시작하는 부분에서 잠시 언급한 박영식 교수와 김영한 교수의 논쟁은 그 뿌리에 차이가 있다고 보인다. 신학적 담론을 ‘생성’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느냐 ‘실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느냐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만유 위에, 만유를 통하여, 만유 안에 계신다(엡4:6)
딱딱한 철학적 담론은 그만하고 다시 성경 말씀에로 돌아가서 오늘 칼럼의 주제를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 에베소서 4장 6절 말씀을 집중하여 되새김해 보려 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언한다: “하나님도 하나(One)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above all), 만유를 통하여 계시고(through all), 만유 안에(in all) 계시도다"(엡4:6). 엡4:6절 후반부를 헬라어 원문대로 직역하자면, “만유 위에(epi panton), 또(kai) 만유를 통하여(dia panton), 또(kai) 만유 안에(en pasin) 계시도다”이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창조적 과정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갈파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두뇌와 마음의 사고구조는 초월성, 과정성, 내재성을 동시에 파악할 인식능력이 없다. 그 결과, 동시적인 하나님의 ‘신적인 존재 양식’(modes of God's Being)을 따로따로 분리하거나 구별해서 이해하려 든다. 만유 위에 계시는 하나님의 초월성만 강조하면 초월적 유신론이 되고, 만유를 통하여 계시는 과정성만 강조하면 과정적 진화신론이 되고, 만유 안에 계시는 내재성만 강조하면 범신론이 되기 십상이다. 2,000년 기독교 사상사를 되돌아보면 한 분 하나님의 세 가지 존재 방식에 대한 어느 한쪽 측면만 강조하는 잘못을 범해왔다. 현대 최고 수준의 신학계 지성인들은 그 점을 깨닫게 되었다.
초월적 유신론 신학은 보수 정통신학의 특징이 되지만 예수의 갈릴리 복음이 보여주는 생명 충만한 신앙의 진수를 플라톤 류(類)의 기독교로 변질시킬 위험이 있다. 역사 현실과 창조 세계는 잠시 거주하는 여인숙같이 여기며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찬송가를 선호한다. 과정적 유신론 신학은 진화론적 최첨단 진보주의 신학의 특징이 되지만 갈리리 복음이 화이트헤드 류(類)의 과정철학에 의해 창조주에 대한 경외신앙은 약화될 위험이 있다. 내재적 범신론 신학은 스피노자나 셸링 류(類)의 ‘능산적 자연’(能産的 自然)을 강조하는 사상가들의 특징이 되지만, 자연 그 자체를 신격화하는 자연신론에 빠질 위험이 있다.
위의 언급이 지나치게 신학적 노력을 단순화시킨 단점이 있지만, 칼럼자가 강조하려는 의도는 예수께서 열어가신 갈릴리 복음 또는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속에 출현했던 그 어떤 신학 체계나 교리로서는 담아낼 수 없는 ‘정의, 평등, 평화, 생명, 그리고 사랑의 능력 그 자체’였다는 점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께서 갈파하신 바처럼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인 “하나님 경외와 이웃사랑”(막 12:30-31)이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한세상 함께 살아가면서 우리가 만나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하는 것”(마25:45)을 떠나서는 없다는 단순명료한 가르침에 순명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무엇이 정통신학인가 또는 이단적 신학 요소가 있는가 없는가 등등 경직된 정통신학 논쟁을 버리고, 갈릴리 원복음에로 돌아가야 교회도 살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다. 기독교 복음은 생명적이어야 하고, 감성적 미학이 동반되어야 하고, 현실을 진선미로서 고양시키는 기능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잖으면 정통신학은 율법이 되고 밥통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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