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7월부터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휴전회담이 지속되고 휴전으로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양측이 모두 확전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과 소련은 추가 병력을 투입하지 않았고, 트루먼 미 대통령은 만주 폭격과 압록강 다리 폭파를 주장하는 맥아더 총사령관을 해임함으로써 확전 의지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승만 정부는 계속 북침을 주장하면서 지금이 남북통일의 기회라고 호소하였다. 미국이 이 상태에서 휴전을 하고 빠지면, 차후 공산세력의 재침을 막아낸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을 압박하면서 강수로 일방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공산당 치하에 살기 싫은 한국의 아들들에게 자유를 주고, 북한의 재침에 대비할 안전판을 마련하기 위한 이승만의 탁월한 전술이었다.
미국은 대한방위조약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1953년 2월 27일 휴전협정이 서명되었다. 그해 10월 1일 한미방위조약이 정식으로 조인되어 1954년 11월 18일 발효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 경비대 수준의 9만여 명에 불과한 국군은 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의 도움으로 20개 사단 70만 명 규모로 성장해 있었다.
6.25 전쟁에서는 국군 62만 1,479명, 유엔군 15만 4,881명을 포함하여 77만 6,360명의 전사자, 부상자, 실종자, 포로 등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그중 12만 3,000명의 유해는 아직도 수습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미군 수뇌부는 지휘역량의 향상을 위해 한국군 장교들을 미국에 보내 군대를 지휘하는 일을 배우게 하였다. 그들은 선배들을 대신하여 상급부대를 지휘하게 되었고 국군의 성장을 견인하는 중요한 인적자원이 되었다.
제2. 제3 묘역에 잠든 분들은 대부분 베트남 전쟁 장병들이다. 한국군의 파병은 4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제1차 1964년 이동외과병원, 태권도 교관단, 제2차 1965년 건설지원단, 비둘기부대, 제3차 1965년 제2해병여단, 청룡부대, 수도사단, 맹호부대, 제4차 1966년 제9보병사단 등이다. 한국군의 작전 개념은 주민이 거주하는 외곽지역에 전술 기지를 설치하여 베트콩(민족해방전선 군사조직)과 주민을 차단, 격리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군사 심리작전이 매우 중요했다.
그에 따라 대부대 작전(1,175회)보다 대부분 소부대 작전(57만여 회)을 단행하였다. 대표적인 전투는 득코전투, 짜빈동전투, 오작교작전, 안케패스전투 등이다. 한국군은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총 32만 5,517명이 참전하여 1만 6,063명의 사상자(전사자 5,099명, 실종자 4명, 부상자 10,962명)를 냈다. 이들 전사자는 제2, 3, 21, 24, 26, 5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제2묘역 맨 앞자리에는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의 묘가 있다. 묘비명이 “그대들 여기 있기에 조국이 있다”이다. 자유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준 전사자 앞에 어떤 공적과 훈장도 의미가 없다고 백선엽 장군은 늘 말했다. 채명신 장군은 자신이 장군이 된 것은 전쟁터에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병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나의 가장 가까운 전우들인 사병묘역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했다.
제15묘역에는 재명신 장군의 동생 채명세 중위가 묻혀있다. 6.25 전쟁에서 소대장으로 전투를 하다가 1952년 7월 고성에서 전사했다. 형제가 지휘관으로 참전하고 동생은 전사한 것이다.
또한 장군에게는 전선의 비화가 있다. 백골 병단이라는 육군본부 직할 유격부대를 지휘하던 당시 채명신 중령은 정보를 입수하여 김일성의 오른팔이라고 하는 길원팔(북한군 중장) 북한유격 총사령관을 생포하였다. 인간성과 그가 가진 수많은 정보가 아까워서 전향을 적극 권고했지만 끝까지 거부하자, 스스로 죽을 수 있는 명예를 지켜 주었다. 그리고 그가 데리고 다니던 고아가 둘이 있었는데 여자아이는 전쟁터에서 죽고, 남자아이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보호하다가 자신의 동생으로 입적시키고 정성껏 양육했다. 그 소년이 잘 성장해서 서울의 유명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병사들이 있었기에 지휘관이 있었고,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다. 6.25 전쟁은 수많은 장병의 무덤이 되었다. 장병들은 농민군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농민의 자제들이 많았고, 소모품 소위라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로 초급장교들의 희생이 컸다. 그러나 국가의 손길이 미치지 못했던 1960년대 말까지도 거리에 나섰던 전상 용사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미망인들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다. 미망인이라는 말은 아직 따라 죽지 못한 사람이란 뜻으로, 본인이 스스로 낮춰 부르는 말로서 타인이 지칭할 경우 실례가 될 수 있다고 표준 국어 대사전에서 설명하고 있다.
국가유공자 등 단체 설립에 관한 법률에 대한민국전몰군경 미망인회라고 호칭한다. 우리에게 자유와 양지를 선물한 현충원에 잠든 호국용사의 유족들에게 국민적 관심과 지원이 지속적으로 있어야겠다. <계속>
이범희 목사(6.25역사기억연대 부대표, 6.25역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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