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퍼와 이승만은 그 시대의 국제맨이었다. 지도자가 되려면 글로벌 마인드가 필요할 뿐 아니라, 거기에 따른 외교력은 물론이거니와 출중한 어학 실력이 뒷받침 되고 준비된 사람이어야 한다. 거기다가 미래를 내다보는 선견자 적인 지도자여야 한다. 카이퍼는 네덜란드 정치지도자로서 그렇게 준비된 지도자였고, 이승만 또한 몰락한 이조와 나라를 빼앗긴 후 망명하여 40년간 고생을 하면서 지도자로서 준비되고 있었다. 그는 그 어려움 속에서 꿈을 버리지 않았고, 일본에게 빼앗긴 조선의 치욕을 전 세계지도자들에게 호소하면서 외교적 노력을 했을 뿐 아니라, 세계 각국을 여행하면서 자유대한민국을 세우려는 준비를 했다. 이승만은 미국의 동부 즉 워싱턴, 뉴저지, 뉴욕, 볼티모어, 서부의 센프란시스코, L.A 등을 종횡무진 뛰면서 독립운동을 했었다.
특히 하와이를 거점으로 한인들을 규합하였고, 무지에 덮여 있는 아이들을 깨우치기 위해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세웠을 뿐 아니라, 그들을 차세대 인물로 키우기 위해 하와이주에 흩어져 있는 섬들을 직접 방문하면서 교포들을 본섬으로 모아 기숙사를 지어 학생을 가르쳤다. 특히 이승만은 여성 교육에 뛰어난 인물이 되어 헌신하였다. 그러나 세계 어디를 가든지 한인사회는 파벌이 많고 싸움이 많았다. 한국인은 머리 좋고 똑똑한 것은 맞지만, 단합할 줄 모르고 싸우는 것이 어제오늘이 아니었다. 한국 속담에 「닭대가리는 되어도 소꼬리는 되지 말라!」 했던 것처럼 독립운동하면서도 서로 탄핵하고, 서로 욕을 하고 패거리를 만든 것은 한인들이었다. 지금도 전 세계에 흩어진 한인사회나 선교 현지도 엇비슷하게 함께 할 줄도 모르고 단합할 줄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이승만은 외로운 지도자였다. 그래도 그는 그 어려운 조건에서도 미국 전역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으로, 스위스 제네바로, 상해를 배와 비행기로 세계를 누비면서 피 말리는 외교전을 벌였다. 그렇게 다니던 중 제네바에 위치한 레만 호숫가 한 식당에서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 도너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고, 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건국 후에 이승만의 오른팔이 되어 크게 활약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하와이로 갈 때도 평생 쓰던 타이프라이터를 가져갔다. 그 타이프라이터는 프란체스카 도너의 손이자 입이었다. 아직도 컴퓨터가 없던 시절, IT가 없던 시절의 그 타이프라이터의 모든 것이 외교문서였고 미국과 세계지도자들과 소통하는 이승만의 손이요 입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건국 이후의 외교에서 프라체스카 도너를 빼고는 말할 수 없다.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가 원팀이 되어 전 세계를 쥐락펴락하면서 일했던 것은 한국 외교사에 다시 조명해 볼 만하다.
이승만보다 반세기 전에 활동한 아브라함 카이퍼도 당 총재요 수상이었고 철저한 성경적 세계관을 가진 지도자였고, 그도 국제맨으로서 세계를 지구본 위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여행하면서 지도자들과 만나면서 꿈을 키웠다. 네덜란드는 우리나라보다 작다. 땅이 작아 바다를 땅으로 메꿔 쓰는 곳이 3분의 1이나 된다. 네덜란드는 심지어 돌과 모래를 이웃 나라에서 수입해 온단다. 또한 그 나라는 산이 없다. 남부 드리베르건(세계의 산)이라는 곳을 가봐도 약간의 언덕뿐이다. 그러다보니 작은 나라지만 평평하니 땅을 가장 넓게 쓰는 나라이기도 하다. 동네마다 잔디축구장 몇 개는 기본이다. 카이퍼는 1898년에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 특강을 위해 기선을 타고 암스텔담 항구에서 출발한 배는 45일간 항해 끝에 뉴욕항구에 도착한다. 프린스턴에 특강을 하러 갔지만, 워싱턴에서 로스벨트 해군 차관을 만난다. 로스벨트는 후일 대통령이 되었고, 이승만은 로스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게 된다(Roosvelt는 미국식으로 루스벨트로 읽지만, 사전에는 로스벨트로 읽는다. 왜냐하면 Roosvelt는 화란이민자이므로 그 나라 사람들은 로스벨트라고 발음한다)
카이퍼는 영국으로 가서 D.L Moody의 천막집회를 갔다. 총선이 있던 해인데 그 바쁜 틈에도 참모들과 함께 성령 충만을 받고 싶었다. 카이퍼 박사는 당시 남유럽과 소아시아 지역을 순방하고 두 권의 두꺼운 여행기를 남겼다. 카이퍼는 세계를 꿈꾸는 여행가이기도 하다. 그가 여행하고 접촉한 나라들은 <미국>은 물론이고 <포르투갈> <스페인> <모로코> <튀니스> <수단> <이집트> <이슬람의 모든 나라> <헬라의 모든 나라>였다. 그리고 카이퍼는 이들 나라를 순방하고 1907년에 500페이지 분량으로 두 권의 책에 자신의 여행기를 썼다. 카이퍼의 관심은 그냥 조국을 기독교 세계관 위에 든든히 세우는 것뿐 아니고, 네덜란드가 유럽의 중심국가 되도록 터를 닦는 작업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카이퍼와 이승만은 서로 만난 일도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의 뜻은 철저한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 위에 조국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 동분서주했었다.
사람은 그의 시선이 어디를 보는가가 중요하다. 눈앞에 있는 유익만 보려는 사람은 생각이 너무도 좁다. 사실 이승만 시대에도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대륙세력이 유일한 줄 알고 중국과 구소련으로부터 무슨 지원과 경제적 유익을 보려 했지만, 이승만은 태평양 넘어 있는 미국과 유럽을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시선이 어디에 고정되는지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바뀐다.
카이퍼와 이승만! 그 둘의 시선이 세계를 바라볼 수 있었기에 지금의 두 나라는 선진국 대열에서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정성구 박사(전 총신대·대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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