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와 의사는 그 역할에 있어 유사한 면이 있다(물론 여기서 말하는 목사는 신부나 승려 등을 포함한 사제직 개념이다). 전자가 주로 사람의 영혼을 다룬다면, 후자는 신체와 그에 따른 정신․신경적 부분을 다룬다. 전자와 후자를 합한 영·혼·육(신체)은 한 인간을 존재케 하는 전인적 총합이다. 이 총합은 어느 부분도 중요치 않은 곳이 없다. 이를테면 손가락 끝에 가시가 박히면 온 몸이 고통을 느끼고, 마음이 상하면 영·혼·육 전체가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그 역할은 부분에 차이가 있다. 목사와 의사는 사람의 이런 중요한 요소를 나누어서 맡는 대표적 직군이다. 따라서 자신의 본분을 알고 충실하게 그 직임을 수행하는 목사나 의사에 대하여 사람들은 존경심을 나타낸다. 존경의 객체는 물질적 규모와는 전혀 무관하다. 쉽게 말해서 교회가 크고 구성원이 많다고, 대형병원이라고 해서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러한 존경심은 목사나 의사가 사명감을 잘 인식하고, 상황과 형편과는 무관하게 그 사명감을 잘 수행할 때 받게 되는 보응이다.
인구비례에 있어 목사와 교회의 수數는 한국이 단연 세계 제일이다. 한국은 도시이든 농촌이든 밤이면 십자가 불빛이 여기저기서 빛난다. 그 빛을 영적인 눈으로 보는 사람은 요한복음 서두에서 말하는 ‘생명의 빛’으로 보고, 육적인 눈으로 보는 사람은 7,80년대 동네마다 있던 다방, 지금도 여기저기 있는 동네 약국만큼이나 많다고 놀란다. 경제적 측면으로만 고려하면, 수요와 공급이 불일치하는 공급과잉 상태이다. 따라서 정규 신학대학의 정원미달이나 군소신학의 신학생 유치에 대한 어려움을 우려하고 하소연할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신학교 숫자 자체를 확 줄여야 한다. 더욱이 고령화 사회가 본격화 되고, 신학교를 졸업해도 마땅히 사역할 곳이 없는데 왜 정원미달을 걱정해야 하겠는가?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목사 내지 신학생의 수요와 공급에 관한 경제규모를 말하지 않는다. 영적인 사람은 공급과잉을 하나님의 ‘넘치는’(공급과잉) 은혜로 생각한다.
자신의 소명과 사명을 아는 목사는 환경과 처지를 탓하지 않는다. 설악산 흔들바위가, 왜 자신을 그곳에 두었느냐고 탓하지 않듯이 말이다. 교회는 천차만별이다. 초대형교회로부터 대형교회, 중형교회, 소형교회, 미자립교회 등등. 하지만 소형교회와 미자립교회가 절대다수이다. 대형교회의 목사에 대한 처우는 삼성이나 현대의 CEO에 못지않다. 평소의 사례비 혹은 은퇴시의 퇴직금은 작은 교회 목사들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액수이다. 하지만 정신이 똑바로 박힌 목사, 자신이 기름부음 받은 주님의 종임을 자각하는 목사는 생계가 어려워 이중직을 할지라도 그것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육의 눈으로 볼 때는 자신이 선택한 직업같이 보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택하심에 따른 것임을 알고 감사로 묵묵히 수행하기 때문이다. 영혼을 다루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영혼을 잘못 다루게 되면 그 영혼을 지옥으로 보내고, 잘 돌보면 천국가게 한다. 영혼은 육신 못지않게 중요하다. 영혼 없는 육신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육신이야 아무리 오래 살아도 대개 100년도 못 살지만, 영혼은 육신이 죽어서도 영원히 존재한다. 천국에서 혹은 지옥에서 말이다.
의사는 목사와 매우 유사하다. 의사는 사람의 신체를 치유하는 직업이다. 따라서 의사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다. 내 병든 몸을 고쳐준 의사에 대해 고마운 줄 모르고 존경할 줄 모른다면 그는 개만치도 못한 인간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잘 돌봐주는 사람을 개는 흔드는 꼬리와 눈빛 등 몸 전체로 고마움을 표현할 중 알기 때문이다. 의사는 똑똑해야 한다. 다시 말해 머리가 좋아야 한다. 따라서 의대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수능성적 최상위 그룹에 속한다. 그 높은 지능이 어떻게 가능케 된 것인가?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인가? 부모의 유전인자 덕분인가? 육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영의 눈으로 보는 사람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것은 창조주의 섭리에 속한다. 다시 말해,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해서 의대에 진학하게 된 것은 자신의 미덕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섭리와 은혜에 의한 것이란 말이다. 의사의 히포크라테스 선서, 직업윤리, 사회적 책임의 근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의사도 목사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부여된 천부적 소질에 따른 사명을 책임감을 가지고 잘 감당해야 한다. 목사는 물질에 초연해도 되지만, 의사는 사회적 명예와 금전적 대가가 반드시 최상급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전혀 합당치 않다.
사람이 이 땅에서 삶을 영위하면서 누리는 내용물은 시간이 지나면 참으로 덧없다. 죽을 때 자신이 평생 이룬 재물을 싸 짊어지고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두 손을 꽉 움켜쥐고 울음을 터뜨리며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오는 인간, 죽을 때는 두 손을 활짝 펴고 눈과 귀를 모두 닫은 채 이 세상을 떠난다. 자신이 태어난 태고의 본향으로! 그러므로 이미 형성되어 있는 사회적 기득권을 조금의 변경도 용납지 않으려고, 자신에게 천부적으로 부여된 그 사명감을 팽개치고 자리를 이탈하는 것(의사들의 집단 파업 행위)은 육신의 생명을 잘 돌보라고 주어진 천부적 재능을 자기 스스로 하찮은 것으로 비하시키는 것, 성경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 ≪논어≫나 ≪서경≫이나 ≪열자≫의 표현을 빌리면 천명天命을 거스르는 것이다.
역사를 이루어가는 주역들은 인간이지만, 그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 당신의 나라(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신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각종 사건과 천재지변, 역병과 전쟁, 선인과 악인들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도구는 뚜렷한 흔적을 남긴다. 단순한 도구는 용도가 끝나면 폐기처분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부응하여 순종한 도구는 영원한 상급이 따른다. 따라서 목사든 의사든 하나님의 은혜 속에 들어가야지, 단순한 일회성 도구에 불과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잠시라도 오인하여 위중한 생명을 돌보는 자리에서 이탈한 의사가 있다면, 좀 더 넓은 혜안의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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