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 두 가지 이유다. ‘할 수 없음’(can-not)과 ‘하지 않음’(will-not)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에 궁극적인 이율배반이 존재한다. 하나님보다 맘몬, 즉 돈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멀리하신다. 우상의 죄를 갖고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다. 또한 ‘돈이 나의 목자가 되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외치는 사람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부자에게는 두 가지 장벽을 넘을 수 없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이유다. 미혹에 대한 주요한 공간적 의미는 목자 없이 길을 잃고 멸망하는 양의 모습이 소개된 곳에 사용되었다 또는 길과 결합된 곳에서 가장 뚜렷이 나타난다. 그러나 미혹은 공간적 의미가 아니다. 항상 신학적 의미다. 사탄의 최후 패배는 두 단계를 거쳐 일어난다. 첫 번째 단계는 무저갱에 천 년 동안 갇혀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세세토록 불못 속에 던져지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세상에 대해 비판적이면서 동시에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일곱교회를 향한 메시지에서 저자는 자신이 바벨론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 차원들에서 제시된 문제들을 다루는 예언적 증인임을 자각하고 있다. 독자들에게 바벨론의 행위들에서 나오라고 요청한다.
이승희 – 키워드로 묵상하는 요한계시록
사람들은 흔히 상황에 자신을 구속시킨다. 그리고 상황이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며 상황을 자기 도피처로 삼아 숨는다. 가정과 부모, 나라, 주변 사람 때문이라는 말을 수없이 듣는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신자인 우리가 이렇다면 전혀 성경적이지 못하다.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고 있고, 그 은혜의 크기와 능력을 안다면 이럴 수가 없다. 우리가 겪는 일들 중에 처음에는 마음 들어 좋아 보이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라진다. 사람이 그렇고 일이나 환경이 그렇다. 상황이 달라진다. 그때 우리 나름대로의 기준이 발동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이 모르는 상황이란 있질 않다. 그것이 사람 눈에 아무리 좋지 않게 보일지라도 말이다. 하나님은 상황을 요리조리 피해 가는 미꾸라지 신자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 상황을 하나님의 은혜로 극복해 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신다. 그리고 그 결과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우리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들인지 알게 하시길 원하신다.
이은호 – 꿀꿀한 오늘이라도 주님의 기대로 살기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기도해야 한다는 점이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 기도의 방식은 열릴 수 없다. 기도는 마치 호흡과 같다. 사람이 숨 쉬지 않고 살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기도하지 않고서는 살지 못한다.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신앙생활을 결코 정상적으로 할 수 없다. 일단 기도하기 시작했다면 그 후에는 충분히 하나님께 집중하며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찬양하면서, 방언하면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기다릴 수 있다. 어떤 방법이든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집중하는 것이 포인트이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 ‘주여 말씀하옵소서. 즉시 순종하겠습니다’라며 하나님의 임재 앞에 머물러 있으라. 매번 무엇인가 느낄 수는 없겠지만 하나님께 경청하는 태도, 하나님을 기다리는 태도, 하나님께 집중하는 태도가 있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더 훌륭하게 들을 수 있다.
강하룡 - 간절함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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