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너무 쉽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까? 진짜 향나무와 가짜 향나무의 차이는 도끼에 찍히는 순간에 드러납니다. 진짜 향나무는 찍힐수록 향기가 진동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자인지 아닌지는 평소에는 판가름이 나지 않습니다. 건강, 재물, 자신의 계획이 찍히고 떨어지고 빼앗기고 부서지고 깨어져 나갈 때 드러납니다. 이러한 순간에도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기뻐한다면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만나면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도와달라는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암에 걸렸다고 하면 한순간에 새벽기도 체질이 됩니다. 하지만 어려움이 사라지고 문제가 해결되면 예수님 생각이 싹 사라집니다.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어려운 형편이든지 아니든지 한결같이 주님을 바라봄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될 때 인생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유기성 – 내 안에 거하라
삼손이 살던 때에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여기며 자기 마음이 가는 대로 살았습니다. 오늘날과 정말 비슷하지 않습니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서 ‘절대 진리’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렸고, ‘상대적인 가치’가 마치 진리인 듯 여겨지고 있습니다. 진리를 찾는 사고나 노력을 격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진리를 찾았다고 말하면 그것은 참된 진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요즘에는 ‘절대 진리’를 찾기보다는 자신의 입맛에 맞춰서 ‘자신이 원하는 진리’를 만들어 가는 것이 더 인정받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매력적으로 여기고, 이런 모습을 추구하는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역사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또 하나의 사사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절대 진리’가 놀림을 받고 웃음거리가 되는 반복된 사사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사사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홍길 – 삼손 X-파일
내 것으로 어려운 이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구제’ 정도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를 일구었던 ‘환대’라 할 수 없다. 사도행전의 환대는 나그네에게 묵을 곳을 마련해 주는 정도의 일시적이고 한정적인 모습은 아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살아온 이야기가 다르고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을 오래 참고 기다리면서 우리 몫의 ‘자리’에 그들의 ‘얼굴’을 기꺼이 내어주기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그래서 낯선 타인이 나와 우리 공동체에 적응하기를 요구하거나 순응하기를 기대하는 대신 나와 우리가 깊어지고 넓어져서 낯선 그들에게 자리와 얼굴을 내어줬다. 그것이 예수님이 자신을 저주하던 사울에게 보여준 환대였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방인들에게 기꺼이 보여준 예수님의 환대였다. 이렇게 초대교회의 정체성은 환대의 공동체였다. 이 책은 예수님이 바울에게 보여준 환대, 베드로가 룻다의 애니아와 욥바의 다비다와 무두장이에게 보여준 환대, 도저히 함께 할 수 없었던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된 베드로와 바울의 환대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환대는 어떤 덕목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공동체, 교회의 정체성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박대영 – 환대의 사도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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