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 문이 열렸다/ 오너라, 나의 봄아 오너라!/ 너는 내 가슴에 떨리는 대로 떨리는구나/ 나의 봄아 오너라/ 나무 잎새들의 속삭임 속으로” R. 타고르는 ‘나의 봄아 오너라’라는 시에서 봄이 오면 가슴이 떨린다고 했다. 수필가 피천득은 “봄이 사십을 넘은 사람에게도 온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며 봄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을 고마워했다.
본문은 사마리아 땅에 찾아온 봄 이야기다. 마치 기구한 운명 가운데서도 메시아가 가져다줄 생명의 봄을 기다리던 한 여인의 영적 춘심(春心)의 고백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의 숱한 사람들의 봄맞이하는 소리를 듣는 듯하다.
메시아 기다리는 목마름을 밝히자(25절) 그녀의 고백에 감동하셨을까? 예수님은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26절), 자신이 사마리아인들이 기대하는 ‘타헵’(Taheb). 메시아이심을 밝힌다. 요한복음에서는 처음으로 자신이 메시아임을 직접 밝히신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면서 이 여인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시간,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드디어 생명의 봄, 만족의 봄을 맞는다. 그리고 봄을 맞자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고 싶어 가슴이 설레었을까? 이 여인은 자신이 만난 봄을 ‘사마리아의 봄’이 되게 한다. 사마리아인들 입장에서는 너무 뜻밖의 여인으로 인한 것이기는 하지만 결국 사마리아의 봄이 꽃피게 된다. 그 봄이 어떤 봄인가를 살펴본다.
우물가에서 봄을 맞다
예수님을 만나 나눈 대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봄을 재촉하는 봄비 같았다. 배한봉 시인이 봄비를 “구름의 눈썹 아래로 휴가 떠난 태양의 안부가 궁금했지만/ 간절했던 것들은 간절하게 자라서/ 척박한 페이지에 초록빛 문장을 새겨 넣었다”고 노래했는데 예수님의 말씀은 조용하면서도 간절하게 여인의 마음에 초록 문장을 새겨넣었다. 봄을 느끼게 한 것이다.
드디어 봄과 여인이 만난다. 예수님이 물 좀 달라고 요청하실 때 찬바람이 불던 여인이 아니다. “유대인이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 하냐”, 여인의 반응은 분명 독설 섞인 항변, 차가움 그 자체였다. 하지만 자신과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랑으로 여기던 이 수가성 우물을 생수라고 여기며 조상 야곱으로부터 받은 기업이라고 자랑으로 여겼는데 그 야곱의 우물을 우습게 여긴(?) 예수님과의 대화가 무르익으면서 봄바람을 느끼기 시작한다.
생수에 목이 말랐던 여인은 예수님이 갖고 계신다는 그 생수를 달라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생뚱맞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적잖게 당황했지만 곧 봄을 재촉하는 봄비로 느낀다. 이 여인의 마음은 자연적인 목마름에서 도덕적인 허물과 아픔을 지나 종교적 차원, 영혼의 봄을 찾아 올라간다. 그리고 예배에 대한 질의 응답 후 마침내 모든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되시는 ‘메시아’를 기대하며 동토같이 얼어붙었던 마음이 풀리기 시작한다. 자신의 모든 인생고의 문제 해결이 오실 메시아 그분께 달렸다는 사실에까지 여인의 마음이 열렸다. 그래서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리이다”(25절), 자신이 만난 춥고 답답한 긴 겨울의 어두움은 오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만이 풀어줄 문제라고 생각하게 된다.
바로 그때 예수께서 ‘내가 그’라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셨다. 단호한 예수님의 자기 선언이다. 그야말로 죄와 거듭된 인생 실패라는 기구한 운명의 여인에게 겨울에서 봄의 도래, 구약에서 신약의 도래를 선언하신 것이다. 영혼의 봄을 맞는다. 근래에 나온 CCM 중에 “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건다”는 노래 가사 “내가 사마리아에 가는 이유는 그곳에 울고 있었던 네가 있어서... 아무도 찾지 않는 한낮의 우물가에 이제껏 삶에 지친 네가 내게로 온다”라는 가사처럼 이제 더 이상 삶의 권태로 지친 여인이 아니다. 봄과 만난 여인이 된 것이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나타난 단순한 유대인이나 한 남자가 아니다. 선지자 정도도 아니다. 바로 유대의 그 남자, 자신과 말씀하시던 분이 꼭 만나야 할 메시아였다. 종족(혈통) 편견을 초월하신 메시아, 성(性)을 초월하신 메시아, 물긷는 그릇 같은 인간적 수단도 초월하신 메시아, 자랑스런 조상 그 이상의 메시아, 인간 수요 이상을 다 갖고 계시는 생수요 샘물이시다. 인간의 기만을 초월하는 전능하신 메시아, 남편 다섯 앞에서도 인생을 불만하고 있는 여인의 아픔을 다 알고 계시는 전지하신 메시아, 그리심 산과 예루살렘 산을 초월하시고, 인간의 기본 욕구인 식욕마저 초월하신다. 그분이 바로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서 나를 만나주신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은 생명의 봄 그 자체였다. 자신이 만난 모든 인생고를 풀어주실 생명의 봄, 구약이 아닌 신약, 율법이 아닌 사랑, 정죄가 아닌 용서의 봄이다. 여인이 맞은 인생 최고의 날, 그날은 구원과 은혜의 날이었다.
사마리아에 봄바람이 일다
예수님의 이 여인과의 만남은 개인의 봄이 아니라 사회적 측면으로 봐야 한다. 요한은 결코 한 여인의 인생사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 여인은 유대인이었다면 겪지 않았어도 될 일을 겪으며 살아왔다. 그래서 사회구조적으로 이해를 넓혀야 한다. 만일 이 맥락을 놓친다면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에 너무나 버거운 짐을 지우게 된다. 사회악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데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한다면 그건 너무 가혹한 처사다. 하나님이 인간들을 바라보는 관점도 마찬가지다. 죄악된 사회구조에 휘말려 사는 인생을 하나님은 그저 불쌍히 여기신다. 혼자 헤쳐나가기에는 그 구조가 너무 거대하다. 본인은 전혀 원치 않았던 구조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도 그랬다. 하나님은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호1:2)고 하셨다. 그래서 복음 성가 가사에 고멜을 “음탕한 저 고멜과 같이도 방황하던 나에게” 이렇게 노래하는데 과연 고멜에게 ‘음탕한 여인’이라는 딱지를 붙여도 될까? 그저 개인적인 부도덕성으로만 볼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당시는 이스라엘 전체가 바알 우상 문화에 젖어 있던 때였고, 우상 제단에서 숭배한 후 그 풍습에 따라 부도덕한 섹스 제의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개인에게, 그것도 힘없는 여인에게 이에 저항하라고? 고멜은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우상 문화의 피해자일 수 있지 않나?
사마리아 여인 역시 사마리아 민족의 악에 빠져 있던 여인이다. 이 여인도 유대인들에 의한 민족적 차별의 희생자였다. 진리에 이르는 길이 차단된 채 남편에게서 만족을 얻으려고 발버둥치며 살았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 문제의 본질을 찾았다. 그렇다면 이 여인의 구원은 사마리아 민족을 향한 것 아닌가. 그 민족을 둘러싸고 있던 어둠으로부터의 해방 아닌가.
여인은 동네로 뛰어갔다. 그리고 봄이 찾아왔다고 외쳤다. “투명한 잎사귀의 걸음으로 당신이 내게 들어올 때/ 나뭇가지 안에 갇혀 신음하던 그 춥고 아픈,/ 간절한 것들이 찍어놓은 푸른 바코드/ 젖은 말들이 도처에서 재잘대며 걸어 나오고 있다/ 당신의 아이들이 재잘대며 달려 나오고 있다” 배한봉 시인의 봄비 노래가 현실이 된 것이다.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39절). 바늘구멍과 같이 한 여인이 구원을 받자 큰 구멍이 열리고 민족적 한계와 차별이 무너졌다. 의도적인 사마리아 방문으로 한 여인에게 인생의 봄을 선사하신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봄을 선사하신다.
예수님은 본문은 아니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말씀하셨다. 강도 만나 거반 죽게 된 어떤 사람을 제사장이 보고도 그냥 지나치고, 레위인도 그랬지만 백성들이 기대한 영웅적인 어떤 의인이나 이스라엘인 평신도가 아닌 사마리아인이 다가가 아낌없는 사랑을 행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충격적 비유다. 뿔 달린 마귀 취급했던 사마리아인이 행한 일이라고 믿을 수 없는 비유다. 차라리 강도 만난 사람이 사마리아인이고 그를 구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사례를 들었다면 그래도 나았을 것, 사마리아인이라도 도와야 한다는 그런 사랑의 모범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이 사랑을 행한다는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사랑의 모범을 말씀하셨을까? 아니다. 민족적 편견과 차별을 깨뜨리기 원하셨기에 민족적 편견으로 선입견을 갖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다.
고정된 선입견? 진리를 발견하는데 장애를 줄 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 ‘사마리아에 대한 편견 깨뜨리기’를 계속 시도하신다. 열 명의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았는데 그 중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 돌아와 감사했다고 하셨다. 착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착하지 않고, 악하다 생각했던 사람이 오히려 선량했던 것, 그래서일까? 부활 후에는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선교하라고 명령하신다. 지상위임령에 사마리아를 포함시키신 것이다.
오해는 또 다른 오해를 낳는다고 했던가? 사마리아인에 대한 오해는 다른 방면에서도 있었다. 그들이 그리심 산에 성전을 세운 것은 이단이거나 반신앙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에 대한 열심 때문이다. BC 4세기 사마리아를 비롯한 유대 전역이 헬레니즘의 영향권에 들어가자 이에 대한 반발에서 열성적인 야훼주의자들이 그리심 산에 성전을 세운 것이다.
모세오경만 믿는 사람들, 모세오경에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우라는 말이 없고 단지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으로”(신12:11)라는 말씀만 있을 뿐이다. 신명기에서 그리심 산은 축복의 산이요, 이 인근의 에발 산은 출애굽 후 제단을 쌓았던 곳, 그러니 그리심 산이 예루살렘보다 오히려 성전자리로 더 적합하다고 여긴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엄격하게 해석했다. 지금도 그리심 산에서는 유월절 희생양 제사를 드린다.
그래서일까? 요한복음에는 다윗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고, 모세에 대한 언급이 많다. 이스라엘 왕이라는 표현도 다윗보다는 모세에 대한 언급의 연장선상에서 쓴다. 학자들이 요한공동체를 이루던 주류 중 하나가 이 사마리아 공동체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할 정도다. 사마리아 여인이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4:19)라고 한 말도 모세가 예언한 “너와 같은 선지자”(신18:18)라는 말씀과 연관 지은 것이다. 요한복음은 사마리아인들이 가졌던 모세의 권위를 초월하신 분, 그 위에 계신 분으로 예수님을 소개한다. 둘 다 한계가 있지만 유대인들보다는 사마리아인들이 더 성경적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함께 지내면서 봄이 무르익다
한동안 유행한 유머 가운데 ‘어느 날 변한 여자’라는 유머가 있었다. 사마리아 여인이 꼭 이 유머 속의 주인공 같다. 그 내용은 이렇다. “여우같은 여자에서 여유 있는 여자로, 화난 여자에서 환한 여자로, 따지는 여자에서 따뜻한 여자로, 착각하는 여자에서 자각하는 여자로, 색기있는 여자에서 색깔 있는 여자로, 밝히는 여자에서 밝은 여자로, 남들을 애먹이는 여자에서 남들 때문에 애태우는 여자로, 답답한 여자에서 답을 아는 여자로, 빚이 많던 여자에서 빛을 발하는 여자로.”
멋진 변화다. 사마리아 여인이 그렇지 않나? 이 여인은 꿀벌처럼 동네로 날아갔다. 날개에 비해 몸집이 너무 커서 물리학의 법칙, 공기역학적 이론으로는 나는 게 불가능한 꿀벌이 수십만 km를 날아다니듯 동네로 날아간 거다. 사마리아인들 입장에서는 너무 뜻밖의 여인으로부터 봄소식을 듣는다. 폭탄선언 같은 소식, 하지만 이 여인의 선언이 동네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기 원했다. 그리고 예수께 함께 유하시기를 청한다(40절). 이 여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다는 뜻이다(42절).
여기서 ‘이틀을 유하였다’(40절)는 말이 중요하다. 처음 제자들이 예수님이 만났을 때도 그랬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무엇을 구하느냐”(38)하실 때 제자들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와서 보라”고 하셨고,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39)라고 했다. ‘그날 함께 거하니’, ‘거한다’는 헬라어로 ‘메노’(μένω),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알았듯이 사마리아인들도 이틀을 함께 거하며 예수님을 알아갔다.
이 ‘메노’라는 단어는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도 사용되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15:5)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15:4), 여기 ‘거하다’라는 단어가 바로 ‘메노’다. 예수님은 이렇게 알아가는 거다. 단순한 교리적 정보로 알 분이 아니다. 그분과의 강력한 연합, 사랑의 연합을 통해 알 분, 그래서 말씀도 기도도 핵심이 ‘함께하기’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하기, 하나 되는 연합이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관계 같은 강력한 연합,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틀을 유하신 예수님과 강력한 연합을 이룬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교단이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떤 교리를 믿고 있느냐도 중요하지 않다. 주님은 그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다. “나를 영접했느냐?”, “지금도 내가 네 안에 있느냐?”를 물으신다. 왜냐하면 연합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이고, 연합한 사람이 생명이 있고 풍성한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죽은 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나는 게 핵심이다. 그리스도와 함께해야 한다. 그래야 그 안에서 시원한 샘물이 솟아나는 은혜를 누리며 비가 쏟아져도 변함없이 영혼의 봄날을 살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봄의 전령으로 살게 될 것이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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