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서구에서는 동성애는 소도미(sodomy 성경의 소돔에서 유래), buggery 등으로 불리었다. 당시 동성애자들은 소도미법(Sodomy law)에 의해 체포 구금되었는데, 이런 관행은 196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예를 들어 1952년 영국의 암호해독가 Alan Turing의 체포와 자살은 그 동성애법 때문이었다. 당시 소도미법은 항문성교, 수간 등 사람의 음경과 질 외의 기관을 사용하는 성관계를 포괄적으로 처벌하는 법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동성애는 전통적으로 남색, 계간, 비역질 등으로 불리어졌으나, 역사적으로 소도미법 같은 것은 없었다)
인권의식이 싹트면서, 독일에서 소도미법에 대한 반대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Homosexuality라는 말은, 1860년대 동성애자 인권운동을 하던 독일 법률가 Karl H. Ulrichs(1825-1895)가 연속적으로 팜플렛으로 출판하면서 대중에 알려졌다. 동성애라는 말은 원래 언론인이자 작가인 Karl M. Kertbeny(1824-1882)가 제안하였던 것이다. (이전의 칼럼에서 이미 말했지만, homosexuality는 동성간의 섹스 즉 남자들 사이의 항문성교-소도미-를 의미하며, 동성간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동성애(愛)라는 번역은 잘못된 것이다. 동성 성애(性愛)가 더 올바른 번역이다) 당시 의학에서는 남자들 간의 동성애를 “도착된 섹스“(inversion sex)로 불렀다.
19세기 정신장애들은 거의 모두 유전되는 선천적 뇌의 병으로 보았다. (우리나라에서도 1960년대까지 정신병원을 뇌병원으로 불렀다) 예를 들면 정신분열병(조현병)을, 어린 나이에 발생하는 뇌병이라는 의미에서 “조발성 치매”라고 불렀다. 동성애, 즉 “inversion sex”도 다른 정신장애처럼 뇌의 병, 즉 히스테리나 뇌전증(간질)처럼 뇌가 선천적으로 퇴행한 결과로 보았다.
Ulrichs의 영향을 받은 독일 의사 Karl Westphal(1833-1890)은 동성애를 여성화된 남자 또는 남성화된 여자가 동성간 끌림을 느끼는 현상으로, 이는 선천적이며,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영항을 받아 아탈리아 법률가 Arrigo Tamassia는 1878년 동성애를 "성본능의 도착“(inversion of the sexual instinct)이라 하였다. 프랑스 신경과의사 Jean Martin Charcot(1825-1993)는 당시 히스테리연구와 최면술의 최고 권위자로 유명하였는데, 1882년 동성애를 "성기 감각의 도착”(inversion of the genital sense)이라 부르고, 그 원인을 선천적 뇌 퇴행 때문이라 하였다. Richard von Krafft-Ebing(1840-1902)은 그의 유명한 저술 《성 정신병리학》 (Psychopathia Sexualis)(1886)에서 동성애를 “선천적 뇌 퇴행의 심각한 표현”(a severe manifestation of hereditary degeneration)으로 보았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심인성 신경병”(노이로제)라는 개념을 제안하였다. 이는 뇌의 장애가 아닌 심리적 원인, 즉 불안으로 인한 정신장애라는 의미이다. 그는 이 이론을 히스테리 연구를 통해 논증하였다. (그래서, 전번 칼럼에서 말했듯, 정신분석가들은 동성애를 성도착이라는 일종의 노이로제로 보고 정신분석으로 치료하였던 것이다)
동성애를 범죄에서 병으로 보는 발상의 전환에 따라, 동성애자들을 감옥 대신 병원에사 입원치료를 받게 되었다. 이는 나름 동성애자들의 인권신장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의사들의 동성애 치료방법은 거세, 뇌수술, 최면술, 등 난폭하였다.
당시 영국에서도 "sexual inversion"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영국의 의사 Havelock Ellis(1859-1939)는 다수 동성애자들을 만나면서 동성애가 섹슈얼리티의 한 선천적 변이(a congenital variation of sexuality)이며, 질병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는 아마도 그의 부인이 레스비언이었고 그의 조수 John A. Symonds(도 동성애자였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20세기에 들면서 독일의 정신과의사이자 공개된 동성애자인 Magnus Hirschfeld(1868-1935)는 동성애가 자연적인 생물학적 변이며, 병이 아니라고 하면서 동성애 인권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소도미법을 없애기 위한 로비운동을 위해 1897년 the Scientific Humanitarian Committee를 조직하였다. 1919년 그는 베를린에 성과학연구소를 열어 동성애, 성전환증(transsexualism 트렌스젠더), 이성복장도착증(transvestism) 등을 연구하였다. 그는 20세기 초 최초로 선정횐수술을 시도하였다. 가장 유명한 예로서 “Danish Girl“로 알려진 트랜스여성인데, 그는 자궁이식 수술 후 패혈증으로 죽었다. 1921년에는 성과학에 기초한 성적 개방을 위한 국제적 조직, 즉 ”성적 개혁을 위한 세계연맹”(World League for Sexual Reform)도 조직하였다. 그러나 나치스의 등장과 더불어 그의 연구소와 국제조직은 폐쇄되었다.
동성애가 의학적 문제라는 생각의 연장선에서 동성애자는 신경-내분비적 양성자(neuro-endocrinological hermaphrodites)라는 이론도 등장하였다. 당시 성호르몬 전문가였던 내과의사 Eugen Steinach(1861-1944)는 동물에서 거세하거나 고환을 이식함으로 성적 특성이 어떻게 변하는지 연구하고, 동성애자들에게 이성애자의 고환을 이식해 보려고 하였다.
1917년 공산혁명에 성공한 소련 혁명정부는 역사상 최초로 성혁명적 프리섹스 정책을 시행하였다. 동성애도 합법화하였다. 당시 이를 주도한 사람은 급진적 페미니스트인 Aleksandra Kollontai(1872-1952)였다. 그러나 가정파괴와 매춘과 성병의 창궐 등, 프리섹스와 동성애에 의한 병폐가 심각해짐에 따라, 1930년대 정권을 잡은 스탈린이 프리섹스 정책을 중단시켰다. 동성애도 불법화하였다. 소련의 성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거의 같은 시기 1920년대부터 프로이트의 제자이며 “급진적인” 정신분석가 Wilhelm Reich(1897-1957)가 프로이트 이론에 막시즘을 혼합하여, 정신분석가로는 “유일하게” 프리섹스의 성혁명을 주장하였다. 그는 러시아의 공산혁명을 실패로 보고, 서유럽에서 성 혁명을 통한 막시즘 혁명과 유토피아 건설을 선전선동하었다. 그는 기독교 전통에 기초한 문화를 거부하고, 가정해체, 소아 청소년에게 프리섹스 허용함, 동성애의 정상화 등을 주장하였다. 그의 급진적 주장으로 인해 라이히는 1930년대에 정신분석학회는 물론 독일 공산당에서도 쫒겨났다. 그는 나치스를 피해 북유럽으로 망명하였다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자유로운 미국에서 급진적 프리섹스와 오르가즘을 절대시하는 이론을 펼침으로 “괴짜 과학자”라는 악명을 떨쳤다. 그는 오르가즘을 증진한다는 상자를 고안하여 팔았고, 소아의 성을 연구한다는 명목으로 소아를 학대하였다는 혐의를 받았으며, 말년에는 UFO를 찾는다거나, 우주의 에너지를 이용하여 비를 오게한다는 기구를 만들어 판매하는 등, 기행을 거듭하다가, 결국 사기죄로 감옥에 갇혔다. 감옥에서 그는 편집증으로 진단받았다. 그는 감옥에서 심장병으로 죽었다. 그의 이론을 사상적으로 프로이트-막시즘이라 부르며,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론과 그람시의 이론 등과 더불어 네오막시즘의 한 갈래가 되고 있다. 그의 이론은 나중 학계에서 킨제이 연구를 자극하였다. “청소년들에게 프리섹스“라는 선전선동이 청년들에게 먹혀들었기 때문인지, 라이히의 저술 《성혁명》(1936)은 나중 68학생운동의 지침서들 중 하나가 되었다.
서구 사회의 “엘리트”들의 동성애 옹호운동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오랫동안 다수 대중은 여전히 동성애를 병적으로 보고 “혐오”하였다. (계속)
민성길(연세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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