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고 궁금증이 유발되는 성경 구절이 하나 있었다. 전 1:17절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마음을 썼다는 말이 이해가 되는가?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되 공부를 많이 하는 것도 헛되다고 했으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되는가?
아니다. 자기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것을 알고자 했으나 결국은 헛된 것임을 깨달았다는 내용이 전도서 앞부분의 흐름이다. 표준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나는 또, 무엇이 슬기롭고 똑똑한 것인지, 무엇이 얼빠지고 어리석은 것인지를 구별하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공동번역 개정역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일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어리석고 얼빠진 일인지 알아보려고 무척 애를 써보았다.”
전후 문맥을 통해서 저자의 의미를 파악해보면 다음과 같다.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일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미친 짓이고 어리석은 짓인지를 알려고 애를 써보았다.’
그렇다. 전도서를 11장까지 읽어보면 ‘이게 성경의 내용이 맞나?’라는 허무감과 허탈감에 빠질 때가 있다. 헛되다는 말로 전도서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1장에서 11장까지 읽어보면 허무함밖에 맛볼 수 없는 내용의 책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헛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전 11:9절이 밝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해봤자 모든 것이 헛되다는 의미이다. 전도서를 결론 짓는 주제 구절이 12:1-2절에 등장한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전 11:9절과는 대조되는 내용이 전 121-2절이다. 보통은 조건문이 먼저 나온 뒤에 그 결과에 대한 내용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사는 삶은 모든 것이 헛될 것이다.’ 그런데 전도서는 앞뒤가 도치되어 있는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모든 것이 헛될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산다면.’
그렇다. 전도서의 핵심은 허무라고 하는 앞의 긴 내용에 있지 않고, 뒤편에 등장하는 짧은 조건문에 있음을 알고 읽어야 한다.
전도서의 주제 구절은 전 12:13절이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의 본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들을 순종하는 것이다’란 말이다.
하나님 없는 삶은 허무와 공허와 갈증과 갈등과 고통과 절망뿐임을 보여주는 귀한 말씀이다.
세상의 많은 이들이 공허와 갈증 속에 살고 있다. 마치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진정한 사랑에 굶주린 사마리아 여인’처럼 말이다. ‘이 사람은 참사랑이겠지!’라 생각하고 다섯 명의 남자와 결혼해서 살다가 연거푸 버림받은 외롭고 상처 많은 여인, 지금 동거하고 있는 그 남자로부터도 참사랑을 맛보지 못한 불쌍한 그 여인처럼, 오늘 많은 이들이 고갈된 사랑의 갈증 속에 진정한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이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이들 중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삶 속에서 허무와 갈증을 경험하고 있음을 본다. 이유가 뭘까? 전도서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 없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 중에도 하나님과는 대화나 교제없이 살아가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Nominal Christian)이 적지 않다. 무늬만 그리스도인일뿐 참 그리스도인과는 상관없는 교인 말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믿는다고는 하나 그분과의 교제나 경험이 전혀 없이 죽은 종교인은 아닌지 스스로 점검해보라. 야곱이 어머니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집안에서 편안하고 안전하게 잘 지낼 때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체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형과 부친을 속이고 도망가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을 때,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대화와 교제가 경험되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다.
이런 은혜와 도우심의 역사가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길 바란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와 교제하고 대화하시길 바라고 계신다.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는데, 그분의 양인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만나고 체험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오늘 나부터 하나님을 더 친밀하게 체험하고 그분과의 보다 깊은 교제와 은혜 속에 들어가길 간절히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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