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영화 ”국제시장“에서 주인공은 6.25사변 때 혼자 남한으로 피난하여 고생하며 장사하여 돈을 벌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키우고 결혼시키고 손자까지 보았다. 그는 마지막 장면에서 아버지 사진을 바라보면서 “아버지 이 정도면 가장 노릇 잘 한거지요? 막순이도 찾았어요! 아버지! 정말 힘들었어요”라고 오열한다. 필자는 그 주인공과 같은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크게 공감하였다. 그런 삶은 그에게 의무였고, 그는 그 의무를 다한 것이었다.
인간은 생물학적 원리에 따라 남녀로 태어나고 성장하여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키워 결혼하도록 해준다. 이 원칙 때문에 인류가 존속하여 온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왜 꼭 그래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나오고 있다. 최근 뉴스를 보면 한국의 젊은이들은 상당수 결혼할 생각이 없고, 결혼하더라도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래도 동거는 괜찮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생물학적이 아니라 주로 경제라고 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사랑에 빠지는 수가 없는가? 누군가를 너무나도 사랑하여 한시라도 떨어져 있을 수 없다거나, 그래서 평생 같이 하고 싶은 연인이 없는가? 옛날 유행가 중에 ”내님은 누구실까, 어디 계실까, 무엇을 하고 계실까“같은 노래가 있었다. 그 노래는 ”누군가 내 님으로 정해지면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옛날에는 얼굴도 모른채 중매로 결혼하고 평생 고락을 같이 하면서 가정을 일구었다. 사랑은 맹세였고 책무였다. 결혼 후에는 미운 정 고운 정이 생겨나 헤어질 수 없는 부부가 된다. 그리고 아이를 갖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었다.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은 이상하게 받아들여졌다. 결혼하고도 애가 생기기 않으면 역시 무슨 잘못이 있을 것이라고 오해받았다.
짝을 찾고 자녀를 낳고 키우는 것은 개인의 의지나 의사 이전에 본능적이며 생물학적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래 반복되어져 온 일이다. 지금 우리도 그런 과정을 거쳐 세상에 등장하였다. 우리의 몸과 생물학은 앞으로도 우리로 하여금 그런 식의 삶을 반복하게 만들 것이다. 이는 무의미한 반복인가?
요즘은 이런 삶을 요구하는 것은 ”억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해방과 자유와 자기결정권을 주장한다. 인구가 너무 많아져서 굳이 내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런 발상은 소위 가족계획의 발상인데, 말이 좋아 계획이지 그 발상은 우생학이다. 우수하고 살 가치가 있는 인간만 지구상에 살 가치가 있다는 사상이다. 이 이데올로기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많은 태아들도 태어나기 전에 죽임을 당하였다. 성혁명가들은 그 죽은 사람들 중에 자신도 포함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야 한다. 인간의 생사화복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실 일이며, 인간이 개입 조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신론적 유물론적 쾌락주의자들은 하나님은 없다고 주장하며, 살아있는 동안 쾌락이라도 즐기자고 주장한다. 그것은 미래가 없는 절망적 노력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 생각하는 듯 하다.
우리의 미래는 남녀가 사랑하고 결합하여 새 생명이 잉태되는 과정에 있다. 그 생물학적 과정은 신비롭다. 인간의 몸도 경이롭고 신비하고 아름답다. 사람들은 우주를 바라보거나 지구상의 자연을 보고 경이롭게 여기고 찬탄한다. 하다못해 강아지를 키우면서 귀여워 죽으려 한다. 그러면서 인간사에 대해서는 무책임하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것은 ”성혁명“ 탓이다. 프리섹스의 풍조 때문에, 남녀가 서로를 사랑의 대상이나 부부가 될 대상으로 보기보다 하룻밤 성적 쾌락의 상대로만 보기 때문인 것이다. 그 성적 쾌락은 나의 쾌락이지 상대의 쾌락은 중요하지 않다. 이기적이다. 자연히 그들의 성관계에서는 착취적이며 내가 당하지 않겠다는 경계심과 의심이 분위기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실제적으로는 돈과 성적 매력이 넘치는 사람만 혜택을 누릴 뿐, 보통 사람은 기회를 얻기 힘들다. 그래서 너도 나도 성적 매력을 뿜어대기에 여념이 없다. 여기에 패배한 다수는 여혐, 남혐 하면서 서로 경계하다가 결국 무성애적이 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 선조들이 중매결혼 제도를 만든 것은 시행착오를 통한 하나의 지혜였다고 본다) 그래서 성혁명에서 소외된 다수는 쾌락을 위한 대안으로 포르노와 매춘과 자위와 술/마약에 빠져든다. 그래서 나중 결혼하더라도 이미 정력이 감퇴되어 있고 정자수마저 감소되어 있다. 심신의 노화가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을 배반하니 병이 드는 것이다. 이런 현실이 현대 선진사회의 비극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이를 필연적 진보라고 본다. 그런데 그들은 그 이후에 대해서는 아무 아이디어가 없다-무책임하다.
소아가 사춘기에 들어 성을 알게 되면 자기 몸에 대한 발견을 해가면서 두렵기도 하고 호기심과 신비감을 갖는다. 이성을 바라고 동경하게 된다. 젊은이들의 모험심과 충동성을 이해하기에 어른들은 젊은 남녀를 분리하고 접촉을 제한하였다. 남녀칠세부동석이다.
이런 성적 억제는 단순히 고리타분한 이조시대의 성리학적 윤리, 서구에서는 기독교 윤리 때문인가? 그런 윤리가 왜 인류사에 등장하였을까? 그것은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시대의 성적 타락 때문에 이씨 조선은 성리학의 윤리를 국시로 삼았다고 한다. 서구에서는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의 성적 문란 때문에 기독교가 대신 기독교적 성윤리를 강하게 전파하였다. 그런데 서구기독교 문화는 지금 성혁명에 무너져 가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유교를 탓하며 고대의 음주가무의 문화와 성적 문란이 독버섯처럼 피어나고 있다.
전통적으로 가족이라는 ”의무“이행에 따른 보상으로 부부의 행복이 주어졌는데, 이제는 성적 쾌락만 추구하고 결혼과 생식은 거부되고 있다. 이런 사태가 ”성혁명“인 것이다, 성혁명은 단순한 라이프스타일의 해방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섭리-자연을 거부하고 뒤집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루소가 말한 자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남녀로 만드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시었다.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보살펴 주신다.
어릴 때 학교갔다가 집에 왔을 때 엄마가 안 계시면 공연히 섭섭하였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일하러 가셨으니 당연히 집에 안 계신다는 것을 이해했다. 이것이 가정이고 가족이다. 가족은 남녀가 결합하여 자식을 낳고 양육하는 사랑에 기초한 혈연의 조직이다. 이를 위해 부부의 사랑과 협력과 보완과 위로가 필요한 것이다. 부부사랑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와 같다고 하셨다. 이는 생명적이다. 가족의 다양성이란 생물학적 가족에서의 다양성이다. 그래서 동성양친(同性兩親)은 부부(夫婦)가 될 수 없을뿐더러 애기를 낳고 양육하는 부모(父母)도 될 수 없다. 가족은 혈연이기 때문에 인류사회를 존속시키는 기본 단위가 될 수 있다. 아니면 사회는 ”나의 부모가 없는“ 거대한 고아원을 운영해야 할 것이다.
민성길(연세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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