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셀 포드(W. Herchel Ford) 목사님의 대표작인 『요한복음 강해설교집』에 보면 어떤 사람이 지적한 ‘현대교회의 3가지 특징’이 소개된다. 첫째는 교회가 영혼구원에서 사회봉사로 전향하고 있다고 했다. 교회들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고 애쓰기보다 사회적 불편 해소와 생활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교회들이 기도에서 먹는 것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고 했다. 기도회는 무시되고 교회식당이 더 인기가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많은 교회들이 십일조에서 테이블로 옮겨가고 있다고 했다. 하나님은 십일조하라고 하셨는데 교회들은 판매 수익과 회식을 통한 경비 조달에 더 치우친다는 것이다. 이 3가지 풍조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고 했는데 어떤가?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았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
예수님은 성전이 장사치들의 소굴이 된 것에 분노하셨다. 돈에 미친 사람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환전하던 상을 뒤엎고, 채찍으로 양과 소들을 몰아내셨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메시야적 행동 과시”라 했지만 충격적 행동이다. 그런데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는 가지고 나가라고 하셨다. 분노하면서도 조절(Control) 하셨다는 뜻이다. 돈은 다시 주우면 되고, 양과 소들도 잃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비둘기를 날려보내셨다면 소유자들과 다른 시비, 소송에 휘말리셨을 수도 있었기 때문 아닐까? 가끔 어떤 사람은 너무 열정적이라 남이 상처받는 건 생각하지 않는데 조절이 안 되는 사람이다. 열정도 중요하지만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한편 예수님이 이렇게 하실 때 유대 지도자들은 옆에서 보고만 있다. 놀래서 멍한 표정, 열은 받지만 자기들이 인가해준 매매행위가 부정하다는 것을 알기에 어쩔 도리가 없다. 변명도 못하고, 예수님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 시비도 못한다. 방어할 방법도 없다. 그런데 좀 진정되었을까? 그들이 반격한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18절) 이건 자살골, 스스로 영적 소경임을 인정하는 질문이다. 구약의 예언이 눈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면 “우리가 읽은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네. 그분이 오셨네” 그랬어야 맞다. 그런데 성전을 더럽힐 정도로 타락한 그들은 깜깜하다. 완전 영적 소경 상태다.
그때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19절)고 하셨다. 비유 형태의 수수께끼 같은 답변이다. 문자적인 표현이라기보다는 해학적인 표현, 예수님의 육체적 죽음을 상징한다. 동시에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상징하는 말씀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비웃는다.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겠느냐”(20절) “네가”는 일종의 강조법, 희롱조다. 하지만 그들이야말로 오해한 것이다.
이해를 못한 건 제자들도 마찬가지, 물이 포도주로 변한 기적을 체험할 때 믿었으나 지금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믿는 것처럼 보일 뿐 믿는 게 아니다. 60년 세월이 지나 요한은 이렇게 기록한다.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1-22절) 기억만 잘해도 믿어진다는 말씀이다.
‘기억했다’는 말은 신약 성경 여러 곳에 등장하는 핵심 단어(key word)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아침에 천사가 제자들에게 했던 말도 ‘기억하라’였다(눅24:6). 누가복음 24:7-8절에도 ‘기억했다’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요2:17절에도 ‘기억하더라’ 그랬다. 부활이 기독교가 존재하는 이유, 복음 중의 복음, 복음의 핵심이라는 말이다.
성전이 뭔가?
이 질문은 살면서 꼭 물어야 할 근본적인 질문 중 하나다. 성전의 존재 목적과 의미가 뭔지 항상 물어야 성전이 성전다울 수 있다. 인간은 너무 쉽게 흔들려 욕망이 잡초 자라듯 자라 신경 안 쓰면 성전을 변질시킨다. 자기 욕망을 추구하는 곳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인간이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 물론 어디든 계시고, 우주를 만드신 분이 어느 건물에 거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말이라서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공간인 동시에 하나님이 계실 수 없는 곳이다. 이 한계를 알아야 성전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아버지 다윗이 짓지 못했던 예루살렘 성전을 무려 7년 동안 짓고 봉헌하는 낙성식 때 솔로몬은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그는 이렇게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왕상8:27). 최선을 다해 잘 지었지만 하나님이 머무시기에는 부족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이다(왕상8:29). 열왕기상 9:3절에서는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 그러셨다.
당신의 이름을 두신 성전, 우리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뿐인가? 이어지는 솔로몬의 기도를 보면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왕상8:30).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다. 키엘케고르(Kier kegerd)이 이런 말을 했다. “어떤 사람이 기도할 때 처음에는 기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점점 더 조용하게 되어서 결국 기도는 듣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이 계신 곳, 잠잠해야 한다(합2:20). 말을 많이 하는 기도보다 듣는 기도가 중요하다. 기도는 큰소리치는 게 아니다. 목소리부터 겸손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이 주목받은 것도 성전 때문이다. 솔로몬 성전이 무너진 후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다시 지었다. 그 성전이 스룹바벨 성전 또는 제2성전이다. 그러나 모습이 초라했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 이방 이두매 출신으로 유대인의 왕이 된 헤롯은 자기가 너무 인기가 없어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 스룹바벨 성전을 중건하기 시작했다. 모리스는 그가 건축광인 것도 이유가 된다고 했는데 기록에 의하면 BC 20년부터 시작하여 AD 62년경에 완공되었으니 80년 넘게 지었다. 얼마나 화려했던지 헤롯 성전을 보지 않은 자는 아름다운 건축물을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 성전의 위용에 대한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면 “성전의 외부형태를 보는 자는 그 눈과 영혼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 성전은 어느 곳이든 거대한 금판으로 덮여 있었고. 해가 뜨면 금판에서 불같은 광선이 반사되어 그것을 똑바로 보려 해도 해를 직시할 수 없는 것 같이 눈을 돌려야 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엄청났던 모양이다. 그러나 거대하면 뭐하나? 예수님의 예언처럼 완공된 지 7-8년 후인 AD 70년에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로마 티투스 장군에 의해서 박살났다. 남은 것은 성전 벽의 일부뿐, 그게 바로 ‘통곡의 벽’이다.
예수님이 유월절에 가셨던 당시도 공사 중, 46년째 짓고 있었다. 거룩한 공간, 구역 구분이 엄격했고, 통제도 심했다. 여인들은 나오스라 불리는 성소 공간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여인의 뜰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다. 제사장들은 성소 안에서는 앉아 있어서도 안 되고 맨발로 다녀야 했기 때문에 겨울에는 동상에 자주 걸렸다고 한다. 이방인들은 이방인의 뜰까지만 출입가능, 광장의 중간 경계석 안으로 들어갔다가는 죽임을 면치 못했다.
성전은 유대인의 삶의 중심이었다. 외롭고 힘들 때마다 성전 쪽을 향해 기도했다. 절기에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는 것이 삶의 기쁨이요 의미였다. 시편 84편에 성전 사랑이 잘 표현된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1-2절). 사실 성전이라고 해봐야 수달피 가죽으로 된 천막집, 낡아빠진 몇 백 년 된 천막이다. 그런데 이 천막, 이 성막을 그리도 사랑했다. 바라보며 그렇게 행복해했다. 이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시인의 마음이다. 성전에 둥지를 튼 참새나 제비도 부럽다고 했다(3절). 세상 화려한 어떤 곳보다 불편한 장소인 성전, 가고 싶다고 했다(10절). 시온의 대로가 있는 복된 곳,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 성전답지 못하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배하지 않고 뻔뻔스러운 종교적 모임으로 변질된 성전은 의미 없다는 것이다.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성전 회복을 원하신다.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하는 성전, 그런데 하나님과의 만남은 사라지고 인간의 욕망, 인간의 어리석음, 인간의 전통, 인간의 온갖 이데올로기로 얽힌 곳이 되고 말았다. 무너져야 한다. 헛된 것이니까. 인간적이니까.
예수님은 “사흘만에 새로운 성전을 세우겠다”고 하신다.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21절). ‘사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다시 부활하신 그 삼일, 예수님이 몸소 성전이라 하셨다. 성전은 건물이고 예수님은 인격인데 성전의 목적을 생각하면 말이 된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계시 되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시며, 예수님을 모시고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다. 그러니 예수님이 성전이다.
예수님은 몸소 성전이시고 성전의 목적을 이루시는 분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 했다(고전3:16).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의 형태로 교회와 우리 마음 가운데 내주하신다. 그래서 성전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다. 그래서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집에서 모인 20명 정도의 작은 공동체도, 디도 유스도의 집도, 회당장이었다가 개종한 그리스보의 집도, 고린도의 첫 개종자 스데바나의 집도, 가이오의 집도, 공무원인 에라스도의 집도, 고린도 지척의 겐그리아 뵈뵈의 집도 다 작지만 교회로 여겨 통칭 ‘고린도 교회’라 했다. 항구도시의 비린내와 가죽 냄새나는 그곳을 성전이라 한 것이다. 그래서 크든 작든 교회는 존귀하다. 부하든 천하든, 내 인생이 성공적이든 실패작이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위대하다. 그 영혼이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다.
실재는 따로 있다
히브리서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이 진리를 전한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히8:5), 모세가 지었던 지상 성전은 실은 하늘에 있는 실재(reality), 진짜를 흉내 낸 모형, 그림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히9:24), 하늘에 있는 것이 실재, 땅의 성전은 그림자일 뿐이다. 예수님은 본래 그 실재를 드러내신 분이고,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은 그림자다.
그림자는 먹어도 배부르지 않다. 소유해도 남지 않는 허망한 것, 그림자는 자기가 아니다. 실재는 따로 있다. 그림자는 죽지도 않는다. 진정한 고통은 다른 곳에 있다.
요즘 철학이나 심리학에서도 주목하는 현상이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깡(Jaques Lacan)이 유명한 말을 했다. “내가 있는 곳에 나는 존재하지 않고, 내가 없는 곳에 나는 존재한다.” 무슨 말인가? 나라는 것은 세상이 규정한 나이고, 과거의 나일 뿐이지 현재의 나라는 실재는 드러나지 않는다. 내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단지 세상의 소리에 끌려간다. 기껏 의식이 풀리는 꿈속에서나 가끔 본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끊임없이 실재를 찾아가야 한다. 예수를 늘 새롭게 만나야 한다. 진짜 예수가 거기 있고 거기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림자에 속지말라.
우리가 소유하려고 노력하는 재물은 땅따먹기 놀이와 같다. 납작한 작은 돌을 훔치며 열심히 나왔다 들어갔다 하며 자기 소유의 땅을 넓힌다. 그렇게 신나게 놀다가 엄마가 부르면 모든 것을 놓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그림자다. 우리를 배부르게 하는 게 아니다. 예수님은 떡에 취한 무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6:26-27) 그림자에 속한 것은 썩을 양식, 참된 것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다.
그런데 23절에 보면,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그랬다. ‘믿었고,’ ‘믿었으므로’가 아니라 ‘믿었으나’로 끝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믿었으나 그것은 참믿음, 바른 믿음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변덕스러운 마음을 꿰뚫어보시고 당신의 몸을 저희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다고 한다(24절). 예수님은 우리를 꿰뚫어 보고 우리를 아신다. 무서워하라는 말이 아니다. 작아도 우리의 믿음을 보신다는 말이다.
‘이 성전을 헐라’, 세상 것에 연연하며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사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1주일 내내 주의 뜻을 순종하기는커녕 세상에 묻혀 살다 주일예배만 드리며 성전 중심이라 말하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혹시 내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 그림자가 아닌지, 내 것이 아닌 것은 아닌지 반성하며 ‘사흘만에 다시 일으키리라’ 선포하신 새 성전에 걸맞는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