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에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예배는 ‘프로스퀴네오(Proskuneo)’로 ‘예배’ ‘예배하다’(요 4:20, 24)를 가리킨다. 이 말은 ‘~ 를 향해’, ‘~ 앞으로’를 뜻하는 ‘프로스’와 ‘입맞추다’를 뜻하는 ‘퀴네오’의 합성어로 ‘친밀하게 사귀다.’ ‘연합하다.’의 의미다. 존경의 표시로 ‘손에 입을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고, 상대방의 발에 엎드려 입을 맞춰 존경심을 표시하는 것을 뜻한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20)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또한 ‘프로스퀴네오’는 ‘경배하다’ ‘절하다’(행 8:27, 히 11:21, 계 4:10)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행 8:27)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히 11:21)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계 4:10)
‘프로스퀴네오’는 히브리어의 ‘샤하’와 같은 말이며, 공통적으로 ‘복종하다’ ‘항복하다’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외의 의미로 ‘손에 입맞추다’ ‘무릎을 꿇다’ ‘절하다’ 등이 있으며 ‘숭배하다’의 의미도 있다.
‘프로스퀴네오’의 ‘엎드림’의 의미는 타의에 의한 강제적인 복종, 굴복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음이 온전히 수반된 상태에서 경외심을 갖고 엎드리고 경배하는 의미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동작뿐만 아니라 그 안에 내포된 마음가짐의 의미도 중요하게 살펴보아야한다.
‘프로스퀴네오’는 내용과 형식이 함께 공존함을 중요하게 내포하고 있다. 마음과 행동이 일치되는 예배의 의미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뿐만 아니라 그것이 실제적인 경배의 모습으로 표출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배자의 마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면 자연스럽게 겉으로 드러나는 경배의 모습이 구현될 수밖에 없다. 즉 ‘프로스퀴네오’는 예배 안에서 내용과 형식, 즉 마음과 행동이 조화와 일치를 이루어야함을 일깨워준다. 오늘날 예배에서 눈에 보이는 형식만을 중시하거나 혹은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모습들이 있다. 그러나 진실된 예배를 위해, 그리고 참된 예배는 영과 진리의 모습과 같이 우리의 형식과 마음이 함께 공존해야함을 기억해야한다.
예배는 완전한 ‘엎드림’이다. 엎드림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시다. 예배를 드리고 있는 동안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께만 집중하며 그분께만 경배해야한다. ‘프로스퀴네오’는 예배중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는 그런 경배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보는 엎드림을 의미한다. 예배 중 우리의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거나 집중하지 못한다면 온전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은 ‘프로스퀴네오’가 아니다. 삶의 예배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늘 교제하는 삶은 하나님을 항상 바라보는 삶이다. ‘프로스퀴네오’의 예배는 지금의 시대에 세상은 간 곳 없고 오직 하나님만 드러나는 수직적 예배를 의미하며 예배자들이 지향해야할 예배임일 기억해야한다.
또한 예배는 ‘세보마이(sebomai)’의 의미를 갖고 있다. ‘세보마이’는 ‘경배하다’(마 15:9, 막 7:7), ‘경외하다’(행 18:13)라는 의미의 헬라어다. ‘세보마이’는 기본적으로 ‘두려워하다’, ‘경외하다’, ‘존경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히브리어의 ‘야레’와 성격이 같다. 성경 안에서 ‘세보마이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나 태도와 연관되어 있는데, 이것이 경배, 즉 예배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세보마이’에서 파생된 단어 중 하나가 ‘경건’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유세보마이’이다. 여기서 ‘유’는 ‘잘(well)’이란 의미이고 ‘세보마이’는 위에서 언급했던 ‘존경’과 ‘경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두 의미가 합쳐서 ‘경건’이라는 의미가 만들어진 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올바로 경배하고 존경하는 것이 경건에 이르는 삶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였느니라”(마 15:9)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행 18:13)
‘세보마이’는 가장 존경하는 분과 대면하는 자리, 즉 예배의 자리다. ‘세보마이’의 의미 속에서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것은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존경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입술로만의 경외가 아니라, 정말로 내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자연스럽게 숙여지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또한 눈에 보이는 특정한 사람을 향한 존경심보다 하나님을 향한 존경심이 덜하지는 않는지 냉철하게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존경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은 그 어떤 시간보다 가치 있는 시간으로 여기게 된다. 아무리 내가 오늘 중요한 일정이 있고 바쁘다고 하더라도, 내가 너무나 존경하는 사람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어떤가? 그 사람의 말을 바로 옆에서 들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다면 어떻겠는가? 다른 일정을 뒤로 하고 그 자리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을 너무나 소중하게 보낼 것이다.
예배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향한 존경의 마음이 살아있다면, 아무리 바빠도 나의 일정이 예배를 대신할 수는 없다. 아무리 몸이 고단해도 예배의 시간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삶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함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예배자의 마음을 갖게 된다. 예배의 가치가 세상적인 일, 개인적인 일에 대한 가치보다 낮아지고 있다면 하나님을 향한 존경심부터 회복하도록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 그 누구보다 위대하시고 그 무엇보다 소중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내 안에 자리할 때, ‘세보마이’의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자신이 특별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자리에 섰을 때 어떤 모습이 나타나는가? 이런 경우,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공통된 모습이 있다. 바로 ‘떨림’의 현상이다. 내 진로를 결정하는 대학면접, 취업면접의 자리, 소개나 상견례의 자리에 섰다고 생각해 보라. 혹은 평소에 만나긴 힘든 유명한 인사를 접견하는 자리에 서 있다고 생각해 보라. 두려움과 견줄 수도 있는 긴장감으로 인해 평상시보다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떨려야 할 자리가 예배의 자리다. 오늘 나의 하루의 일상, 나의 일주일의 삶과 나의 1년, 나의 평생을 결정할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예배의 자리다. 가장 크고 위대하신 분을 뵙고 그분의 말씀을 자리가 바로 예배의 자리다. 그러나 과연 예배의 자리에서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가장 크신 분을 향한 두려움과 떨림이 있는가? ‘세보마이’가 가르쳐주는 그 ‘설렘’의 의미가 우리의 예배 가운데 구현되고 있는가?
물론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가운데서 예배해야 한다고 배운다. 그러나 그 관계가 있기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임재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경건한 떨림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예배 가운데 거하심을 분명하게 느끼고 그 속에서 두려움을 갖는 자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역시 유지할 수 있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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