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 213번 나오는 단어다. 구약에는 거의 나오지 않는 대신 하나님의 불변의 사랑이라는 개념의 ‘헤세드’(חסד)와 하나님이 사람에게 혹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베푸는 과분한 호의를 뜻하는 ‘헨’(חֵן)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비록 은혜라는 단어가 없어도 구약의 성도들도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은혜에 근거해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 헬라어로는 ‘카리스’(χάρις), ‘공로 없는 은총’이라는 말이다. 요한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 세계의 실재(reality)를 그림자 같은 가짜 세상으로 가져온 성육신이 은혜다. 또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 자체가 은혜임을 드러낸다. 이 은혜가 바로 우리에게는 기쁨이고, 양육의 힘이기도 하다.
그래서 요한은 ‘은혜 위에 은혜’라는 표현을 쓴다.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번역하면 ‘은혜를 대신한 은혜’가 더 맞지만 파도처럼 밀려오고 또 밀려오는, 계속 밀려오는 은혜라면 “은혜 위에 은혜”라는 표현도 괜찮은 것 같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격에 상관없이 넘치도록 주시는 분(Giver), 그래서 너무 행복하다는 고백이 담긴 표현이다. 신약 인물 중 최고 학자인 바울은 서신서를 쓸 때마다 아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축복하며 시작했다.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축복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나보다 앞선 이가 주신다
6-8절에 언급됐던 침(세)례 요한이 재등장한다. 그가 예수님을 내 뒤에 오시는 이지만 ‘나보다 앞선 분’이라고 증언했다는 것이다. 출생 날짜도 먼저고 사역 개시도 먼저인 침(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나보다 앞선 이’라 한 것, 우리 사회처럼 나이와 연공 서열, 기수를 따지는 문화에서는 있을 수 없는 표현이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형이 동생을 형이라 한 것은 선배가 후배더러 선배라 하고, 갑이 을더러 갑이라고 하고, 군대 선임이 후임더러 선임이라 한 것과 같다. 5분 형이어도 형은 형이고, 군대에서는 하루 또는 한주만 선임이어도 대단하다. 꼬박꼬박 존대말 써야 하고 경례도 해야 한다. 직장 상사의 상사행세도 마찬가지다. 오랜 세월을 그 자리에서 일했고, 많은 노하우가 있으며, 일의 효율적 집행을 위해 자리는 존중을 받아 마땅하지만 지나친 경우가 많다. 대학에서도 학년에 따른 서열 관계가 여전하고, 요즘도 판검사 임명 때 기수가 꼭 소개된다. 기수가 중요하다는 거다.
세계 언어 중 존댓말이 살아 있는 몇 안 되는 언어가 바로 우리 언어다. 그리고 우리는 서열을 따지는 문화 속에 산다. 그래서 피곤하고 때로는 비인간적이고 의사소통이 잘 안 될 때도 있지만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가치들까지 무너뜨리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침(세)례 요한은 우리 사회의 분위기와는 완전 딴판이다. 자기가 분명 사촌 형이고, 영적 부흥 운동에 있어서도 선배다. 이미 침(세)례 요한의 운동은 세계적인 운동이 되어 많은 유대인들이 요한에게 침(세)례를 받으려고 요단강으로 몰려드는 추세였다. 대세는 침(세)례 요한, 반면에 예수님은 이제 막 신흥종교처럼 영적 부흥운동을 시작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침(세)례 요한이 절대강자이고, 예수님은 그 요한의 뒤에 오시는 분에 불과했다. 예수님의 운동에 참여한 제자들도 요한의 소개로 왔을 정도였다. 그러니 예수님의 부흥 운동의 발판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침(세)례 요한인 셈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권세를 부릴 만한 위치다. 레온 모리스에 의하면 당시의 사회적 통념도 ‘시간적 우선자는 중요성에서도 우선자’였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을 나보다 앞선 분이라며 높인다.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시기에 먼저 계신 분이라는 말인데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인간의 몸을 입고 있는, 자기에게는 동생이다. 그런데 높여주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27절), 신발끈을 매고 푸는 건 종의 역할인데 그마저도 감당할 수 없다고 한다. 너무 겸손하지 않나? 침(세)례 요한의 그 겸손은 그를 위대한 인격자 되게 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도 침례 요한을 극찬하셨다고 기록했다(마11:11).
예수님은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마18:4)라고 하셨다. 뛰어난 후배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는 것, 자신을 발판 삼아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게 하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인데 웨스트컷(Westcott)에 의하면 “요한은 지금 예수님을 상대적 우월자가 아니라 절대적 우월자로 여기고 있다”. 선재성이 곧 우월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이 나보다 선재(先在)하신 분이라며 아예 자기 자리를 다 양보하고 물러난다. “나는 여기까지” 명확하게 선을 그은 것, 그리고 원래 선임자라 그 자리에 적임자라며 넘치도록 은혜 위에 은혜를 부어주실 분이라고 소개한다.
충만하게 주신다
요한은 이미 예수님을 ‘은혜가 충만한 분’이라고 했다(14절). 이어서 ‘은혜 위에 은혜’라고 했다(16절). 마치 거대한 수원지를 연상케 하는 표현이다. 우리는 그 충만한 수원지 아래서 인생 농사를 짓는 농사꾼, 농사꾼은 수원지에 물이 충만하면 든든하다. 가뭄이 와도 염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환경운동가들은 보를 해체하라고 난리지만 농사꾼들은 절대 반대했던 것이다.
충만함, 이는 이집트의 나일강을 보면 이해가 쉬워진다. 왜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가 “이집트는 나일강이 준 선물”이라 했을까? 이집트가 곡창지대인데 그 이유가 나일강 덕분이라는 것이다. 인공위성으로 찍은 사진을 보면 사하라 사막 등 주변은 다 사막지대이지만 나일강이 만든 삼각주 평야지대는 당시 고대 로마를 먹여 살릴 정도의 충분한 밀을 공급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나일강 상류에 적도 우림 지역이 있기 때문이었다.
열대 지역에서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고 이 물이 나일강을 통해 하류로 밀려오면 하류 지역에는 홍수가 나는데 이 물이 농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물만 오는 것이 아니라 풍부한 유기물들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비료를 주지 않고 씨만 뿌려도 수확이 엄청나다. 뿐만 아니라 이 범람하는 물은 땅의 소금기를 씻어내 염해도 방지해준다. 이게 충만함이다.
우리 영혼은 어떤가? 윌리엄 카퍼(William Cowper)는 일찍 엄마를 여의고 엄한 아버지 밑에서 학대받으며 힘들게 살았다. 정신 병원에도 드나들고, 많은 고통과 절망감을 이기지 못해 런던 시내 다리 위에서 자살도 여러 번 시도했다. 그런데 어느 날 존 뉴턴(John Newton)을 만난 게 터닝포인트, 한때 노예 상인에 죄인 중 괴수 같이 살다가 예수님을 만난 후 완전 딴사람이 된 존 뉴턴을 만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만난다. 하나님의 은혜다. 너무 좋아서 존 뉴턴이 사역하던 곳에 들어가 남은 생애를 뉴턴과 함께 사역하며 68편의 찬송시를 썼다.
그중 ‘샘물과 같은 보혈은’(258장)에 보면 깨지고 상한 인생도 예수님의 보혈로 정해질 수 있다고 했다. 어떤 상처든 보혈의 샘물에 잠기면 나음을 입는다는 자기 간증이고, 버려지고 망가진 인생도 이 샘물을 마시면 새사람이 된다는 자신의 신앙고백이다. 은혜를 입은 카퍼는 18세기 후반 영국의 위대한 시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 인생도 사막 같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을 경험하는 것이다. 영혼이 메마르고 소금기로 가득해도 성령의 충만함으로 씻어낼 수 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충만한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 코드만 맞추면 된다. 우리의 영도 프뉴마, 하나님의 영도 프뉴마 하기오스, 은혜만 받으면 기쁨이 솟아나는 회복이 가능하다
문제는 수도꼭지를 틀지 않는 것, 그리고 수도관이 막히는 것이다. 수도꼭지는 보려고 설치하는 게 아니다. 틀라는 거다. 수도관도 막히면 뚫으면 된다. 막혀서 물이 쫄쫄 흐르는 수준이 아니라 콸콸 흐르게 해야 한다. 요한의 ‘은혜 위에 은혜’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지고 또 쏟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15장에 나오는 포도나무 비유도 같은 뜻이다. 가지가 열매를 맺으려면 붙어있기만 해도 된다(요15:5). 뿌리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으면 잎사귀도 푸르고,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 그러나 공급이 끊기면 잎은 말라 떨어질 수밖에 없고, 과실도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4개의 마음 밭이 나오는데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이 있다. “가시떨기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막4:7), 마가는 가시떨기를 “세상의 염려, 재리의 유혹, 기타 욕심”(막4:19)이라 했다. 누가(Luke)는 ‘욕심’ 대신 ‘향락’(pleasures)이라 했다(눅8:14). 이동원 목사는 길가 밭의 적이 ‘사탄’이고, 돌밭의 적이 ‘육신’이라면 가시밭의 적은 ‘세상’이라며 세 종류의 마음 밭을 그리스도인의 3대 적인 ‘마귀와 육신과 세상’과 연결시켰다. 양다리 신앙이랄까? 말씀을 듣기도 하고 사랑한다고도 하면서 집중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더 큰 관심사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직 예수님께 집중하기만 하면 ‘은혜 위에 은혜’, 그 충만함 때문에 우리는 절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계속 주신다
독일 루터교회 목사이자 신학자였던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가 ‘싸구려 은혜’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당시 독일교회들이 히틀러의 잘못을 눈감아 주고, 그에게 손뼉 쳐주며, 무고한 사람들을 가스실로 보내 비누를 만드는 등 마귀적인 행동을 하는데도 침묵하고 있다며 “구원이 장터에서 헐값으로 나누어 주는 싸구려 상품이냐?”라고 했다. 은혜가 어떻게 싸구려가 될 수 있냐는 말이다.
그런데 그 은혜가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것 때문에 싸구려 은혜, 값싼 은혜가 되었다는 것,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말의 방점은 값없이 즉 공짜라는 게 아니라 값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고 소중한 것인데 그걸 몰라 은혜를 ‘싸구려’로 전락시킨다는 것이다.
기억하라. 위대한 기독교 언어 중 하나인 은혜는 원수 같은 사람에게 자신을 희생하여 그를 구원하는 것이고, ‘기쁨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자발적으로 자기를 주는 것, 어찌 보면 은혜라는 말은 예수님만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요한은 그 은혜를 ‘은혜 위에 은혜’라 했다. 은혜 위에 쌓이고 또 쌓이는 그런 은혜라는 의미다.
바울은 이 은혜를 ‘하나님의 선물’이라 했다(엡2:8). 요한은 그 선물을 하나가 아니고 쌓을 정도로 주신다고 ‘은혜 위에 은혜’라 한 것이다. 세상에서는 받을 자격이 없으면 선물을 주지도 않겠지만 함부로 받아도 안 된다. 공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격이 없는데도 선물을 주신다. 그것도 계속 주신다. 존 뉴턴을 보면 알 것 같다. 그는 항해사인 아버지 덕에 11세 때 노예선을 탄다. ‘해지지 않는 나라’라고 해양 강국 영국에서 배 타는 것은 가장 진취적인 직업이었고 당시 젊은이들에게는 로망이었다. 하지만 그 배로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잡아 미국 노예상들에게 팔아넘기고, 쇠사슬에 묶인 흑인 여성들을 닥치는 대로 강간하고 방탕한 짓을 했다. 또 한때는 영국 해군에 입대했다가 탈영을 기도하는 등 문제를 자꾸 일으켜 함장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 아프리카에서 15개월간 노예 생활을 하기도 했다. 완전 밑바닥을 경험한 것, 그런데 1748년 배 타고 아프리카에서 영국으로 가던 중 성난 폭풍우로 11시간 동안 물과 씨름을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난다.
그러나 병에 걸려 쇠약해지고, 굶어 죽을 뻔하기도 하고 잔인한 일, 야만적인 일, 강간을 매일 목도하며 깊이 절망, 자살을 생각하다 예수님을 만나 회복이 시작되었다. 그는 목회자가 되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두려움이 있었다. 너무 많은 사람의 인생을 망쳐놓고 너무 많은 사람을 죽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같은 포악한 노예상도 정말 용서하셨을까?” 늘 떠나지 않는 실존적 고민 때문에 침실에 이사야 43:4-7 말씀을 걸어두고 묵상하며 살다 82세의 일기를 마치고 천국 가는데 그때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 지금 천국 간다!” 이런 게 은혜 위에 은혜일 것이다. 그 은혜가 감사해서 만든 곡이 ‘Amazing Grace’였다(305장).
측량할 수 없는 엄청난 은혜, 요한은 이 은혜를 깨닫고 어떻게 표현할 수 없어 ‘은혜 위에 은혜’라 했다. 파도처럼 밀려오고 또 밀려오는, 계속 주어지는 은혜라는 것이다. 진짜 세계와 가짜 세계의 실체를 알게 한 은혜, 보잘것 없는 세상을 위해 친히 성육신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하신 은혜, 소금기를 성령으로 씻어주시고, 쓴 뿌리까지 뽑아주시는 행복한 삶의 원천이 되는 은혜, 건강한 것도, 형통한 것도, 이기는 삶을 사는 것도 성공하는 것도 다 은혜, 그야말로 은혜 위에 은혜다.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y)는 은혜 받고 보니 자기에게 있는 것을 누구에겐가 주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그 날도 길을 가다가 불쌍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거지 한 사람을 또 만났다. 줄 게 없다. 그래서 “당신 위해 기도해주겠소” 그리고 거지의 머리에 손을 얹고 “주여, 이 거지가 거지 생활을 졸업하게 해주시고, 이제부터 남에게 손 벌리며 살지 않고 주면서 살도록 복을 주옵소서. 이 깡통이 돈주머니가 되게 해주시고, 거지 옷은 신사복 되게 해주시며, 다 떨어진 신발이 신사 구두 되어 하나님 앞과 다른 사람 앞에 뛰어난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간절히 축복기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그러는데 믿음도 없는 거지가 “아멘”하더니 “지금까지 거지 생활하며 별 것 다 받아봤지만 받은 것 중에 제일 큰 것을 받은 것 같습니다.”하고 깍듯이 인사하더란다. 톨스토이는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했고, 거지는 그 축복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은혜 위에 은혜는 기쁨 꽃이 만개하는 것, 함께 웃으며 사람답게 사는 것, 은혜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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