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희 목사
이태희 목사

하나님이 하나님의 존재를 우리들에게 나타내시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역사”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일이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 즉 “예언의 성취”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일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는 사실을 확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는 언제나 순서가 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먼저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신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 일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거나 사람이 행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는 사실을 확증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하나님이 행하실 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요, 그 “예언의 성취”에 대한 기록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하나님의 일”은 무엇인가?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24:27)

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말씀은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 3:15)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에 관한 말씀이다. 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우리는 “복음”이라고 부른다. 즉 성경은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책이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예언,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모든 예언의 성취는 전부다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지혜, 즉 “복음에 관한 예언”인 것이다. 그리고 그 지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제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에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행3:1-2)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행3:3-7)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행3:8-10)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행3:11-12)

오늘 본문에 기록된 사건은 베드로와 요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거지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따로 있다.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시며, 그리스도께서 이 저주받은 앉은뱅이를 위해, 그리고 이 앉은뱅이와 같은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보여 주고 있는 이야기다. 한 마디로, 이 사건은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이야기다. 그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기 위해 베드로의 설교가 이어진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행3:13-15)

복음이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한 사건이다. 그렇다면, 그 사건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이었는가?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다.” 그것이 복음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왜 복음인가?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행3:16)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의 이름을 믿을 때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이 거지가 나음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믿음이이 앉은뱅이를 낫게 한 것인가?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는 왜 죽임을 당했으며, 하나님은 또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왜 다시 살리신 것이며, 그리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어떻게 이 거지를 낫게 할 수 있었단 말인가?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행3:17-18)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이 모든 일들이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연한 일도 아니요 사람이 행한 일도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행하신 일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계속)

이태희 목사(그안에진리교회 담임, 윌버포스 크리스천 스쿨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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