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는 루터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루터는 복음의 이해에서 온, 자신의 고유한 교회 개념에 근거하여 로마의 교회 개념과 대치해 있었습니다. 루터에게 있어서 복음의 이해에서 온 자신의 고유한 교회 개념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렇기에 루터에게 있어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공동체가 되며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찾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먼저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교회의 실체는 인간이 그리스도와 갖는 관계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그렇기에 루터는 교회에 대해서 “비가시적 교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판별 가능한 “모임”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간의 교제가 일어나는 성도의 공동체로 그리고 “하나의 거룩한 기독교 교회”로 이해됩니다.
루터는 제도적 차원에서의 교회 이해에 관심을 두기보단 말씀으로 모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로서 교회에 대한 이해를 접근하였습니다. 그렇기에 루터에게 있어서 교회는 복음을 통하여 모인 모임이고, 따라서 복음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모인 모임입니다.
교회의 모든 삶과 본성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교회를 알 수 있는 외적인 표지로 세례와 주의 성찬과 복음입니다. 가시적 표지로서 이것들은 루터에게 중요한 요소로 인정되지만, 루터는 다시 말씀이 성례전과 교회의 표지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루터에게서 복음은 유일무이한 것이고 빵과 세례 그 이상으로 가장 확실하고 고귀한 교회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교회의 삶 전체와 실체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의 연결에 대한 루터의 이중적 주장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 없이 존재할 수 없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말속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즉 루터는 교회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의 설교와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결합되어 있다고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루터가 가시적인 부분에 대한 교회의 설명은 어떻게 이해할까요? 루터는 신앙만이 교회의 존재를 식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즉 세상의 눈과 이성 그 자체로는 교회를 식별불가능하며 신앙의 온전한 내용이 하나님의 계시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서 교회는 식별 가능해집니다. 또한 개개인의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모든 교회 기관의 범위를 넘어서 있다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루터에게서 교회의 가시성은 신앙은 볼 수 없으나, 신자들의 신앙 고백에 의해 확인이 가능하기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공동체의 신앙 고백 때문에 교회의 가시적인 실체가 인정됩니다.
결국 진정한 교회의 교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희생제사가 신자들을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만든다는 사실 위에 근거합니다. 성령은 말씀을 믿는 사람들을 서로서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가 되게 하니다. 이는 자기 자아를 위한 실존은 끝이 나고, 서로에게 신비적으로 흡수되는 것이 아닌 사랑을 통해 생명을 온전히 나누는 것(Gemeinschaft)이 됩니다. 이러한 교제에 참여하는 것은 교회의 모든 지체들을 동일한 선물과 과제, 은혜의 소명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루터에게 이러한 ‘함께 함’의 선물은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모든 소유 자산이 다 나의 것이 되며, 나의 짐과 문제와 죄는 그리스도와 모든 성도들에게 속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각각의 사람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교회의 짐을 스스로 자신의 짐으로 져야 합니다.
서로 짐을 지는 것과 대신 담당하는 것은 제사장의 활동입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이의 짐을 지고 그의 의를 가지고 중보하시기에,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이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 위에 세워져 있으며, 교회의 내적 구조는 그리스도인의 서로를 위한 제사장직입니다. 루터 신학자로 알려진 파울 알트하우스는 루터가 단순히 인간적 중재자 없이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개신교적’ 의미에서 만인제사장을 주장한 것이 결코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보편적 제사장직은 종교적 개인주의가 아니라, 그 반대 즉 공동체로서 회중의 실체를 표현합니다. 즉, 제사장직은 “회중”을 의미하며, 그것은 “성도의 교제”의 내적 형태이라는 것입니다.
루터는 성찬의 성례가 성도의 교제로서의 교회의 실재를 표현하고 보장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어거스틴과 아퀴나스가 주의 성찬을 “사랑의 성례”로 다루었다면, 루터는 성찬을 그리스도와 다른 모든 성도들과의 교제와 하나됨의 표지를 받는 것으로 확장합니다. 루터는 주의 성찬은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고유한 성례이며, 교회의 삶의 중심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루터는 믿음으로 성례를 받는 것을 통해 그리스도를 먹는 것과, 그리스도인들이 사랑 안에서 소유와 어려움을 나누는 것을 통해 서로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대등하게 여겼습니다.
그리스도가 주의 성찬에서 우리의 음식과 음료인 것처럼, 우리도 또한 서로를 위한 음식과 음료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리스도를 “먹는 것”과 이웃을 “먹는 것” 사이의 차등성 또한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을 물리적으로 먹는다고 가르쳤고, 이는 이웃 사이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알트하우스는 루터의 성도의 교제 교리가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아주 중요한 개념을 나타낸다고 평가합니다. 그리스도는 두 가지 방식 즉 주고받는 방식으로 현존하시는데, 그리스도는 그가 대신 지는 짐과 도움 속에서 현존하시면서 동시에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 죄인, 무거운 짐진 자들 안에 현존하십니다. 따라서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은 그리스도에게 행한 것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루터의 교회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그들 공동체가 하나의 성례로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백성들은 시기하거나 다투거나 분노하지 않고 인내하고 용납하고 사랑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임재 속에 있는 자들이 누려야 할 권리이며 특권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아픔과 분쟁 속에서 고통받는 수많은 성도들이 이와 같은 교회의 특권을 다시금 누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요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