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를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열고, 나의 일상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과 교제하는 삶이라면, 나에게 주시는 특별한 하나님의 말씀은 성찬과 같다. 예배에서의 성찬은 말씀의 선포를 통해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게 경험하는 상징적인 예식이다. 그러므로 일상에서의 성찬은 깊은 교제의 시간이며 특별한 하나님의 말씀 하심과 깨달음이다. 그렇다면 일상에서의 성찬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일상의 성찬은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은 ‘특별한 메시지’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배자로 인정하시고, 더 큰 은혜를 부어 주시려는 상징적인 계획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그가 우리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고 간음하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다. 그의 일생에서 이 사건은 성찬과 같다. 우리 일상에서의 성찬은 특별한 사건이다. 다윗은 이 사건을 통해 침상이 젖도록 하나님께 용서를 간구했다. 이후 다윗의 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감사에 대한 깊이가 느껴진다(시 51:1-7). 이 성찬의 사건 이후로 다윗이 이전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음이 분명하다. 그가 썼던 시편의 약 70%는 그가 사울에게 쫓겨 다니며 광야에서 쓴 시들이다. 힘든 환경과 여정 속에 다윗이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고 하나님을 찬양했던 증거다.
한편 엘리야의 성찬의 시간을 살펴보자. 열왕기상 18장은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신 850명과 싸운 사건이다. 이 싸움에서 엘리야는 승리했으나 이세벨의 분노로 죽음의 위협을 느껴 광야로 도망치듯 달아난다. 이곳에서 엘리야의 죽기를 간구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바알과 아세라 신 850명을 무찌른 용맹의 선지자가 죽음을 간구하는 모습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다(왕상 19:4). 엘리야는 이 사건 이후에 다시 힘을 얻고 하사엘을 아람왕으로 예후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어주고, 엘리사를 후계자로 세우는 중요한 과업을 완수하게 된다. 엘리야에게 로뎀 나무는 ‘성찬’의 시간이다. 그는 이 시간을 통해 자신에게 주신 새로운 사명을 깨닫고 힘을 얻어 훌륭하게 사역을 감당하게 된다.
오늘의 성찬은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사랑이자 관심이다. 헨리 나우웬은 우리의 고통과 삶의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겠다는 우리를 향하신 선언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나의 짐을 지라. 나의 짐은 온 세상의 짐이지만 가볍다.” 여기 그리스도인의 신비가 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오신 목적은 우리의 짐을 없애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보다 더 진진하게 대하신다. 하나님이 오신 목적은 우리를 초대하여 우리의 짐을 하나님의 짐과, 우리의 고난을 하나님의 고난과 연결시키게 하기 위해서다.”
그는 일상의 하루에서 늘 일어날 수 있는 우리의 어려운 짐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된 새로운 세상임을 선언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향한 위대한 초대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과 연결된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에게 자신의 짐을 주기 원하신다. 그분의 짐이 가벼운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 대신 그것을 져주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난은 여전히 고통스럽지만,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으면 그리스도의 고난과 하나가 된다. 그분의 고난은 우리를 집으로 인도한다. 거기는 전혀 새로운 세상이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일상에서 자주 일어나는 여러 고난과 고통, 어려움의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된 축복의 시간인 것이다. 영성 지도자인 리차드 로어(Richard Rohr)는 이 사실을 명확하게 선언한다.
“우리 모두가 어떻게든 추락한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아신다. 우리로 하여금 하루에 수도 없이 균형을 잃고 ‘파국’을 보게 만드는 일들이 하나님께서는 평소의 비즈니스인 것이다. 우리가 실패할 적마다, 영적 지도자들이 그러듯이,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와, 참 좋은 기회다! 우리가 이억으로 뭘 할 수 있는지 보자!”같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자기 에고를 키워줄 따름인 이른바 ‘성공’을 했을 때는 틀림없이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흠, 뭐 괜찮은 일이 새로 생갈 것 같진 않군.” 몰락과 실패는 인간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평형 장치다. 성공은 그 반대일 뿐이다. 건강한 공동체와 신뢰는 남보다 우월한 우리가 아니라 남들과 같이 고통당하는 우리 둘레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한편 린다 딜로우(Rinda Dillow)는 우리 일상 가운데 고통의 시간이 찬양의 시간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주님께 예배를 드리면 주변 공기가 달라진다. 바울과 실라는 옥에 갇혔을 때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께 예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들의 예배 정신이 대적들과 맞서는 무기가 되었고, 두 사람이 갇혀 있던 옥문이 활짝 열렸다.” 성찬의 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 일상에서 상징적 계획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하루에 있어 성찬의 시간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우리는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반복된 삶을 살아간다. 그러다 보면 몸과 마음의 집중력이 흐려지고, 영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감사도 느슨해진다. 일상의 성찬은 하나님과 예배자인 우리 사이에 새로운 관계로 세우시려는 계획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그의 자녀들에게 무언가를 말씀하고 싶어 할 때가 있다. 우리를 통해 이루고 싶은 계획들이 있으며, 더 크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고 싶으신 일들이 있다. 하나님은 깊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시며, 늘 우리 곁에서 무언가를 나누고 싶어 하신다. 하지만 우리가 영적으로 집중하지 못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너무 분주한 일상의 삶으로 인해 하나님의 관심과 눈길을 지나쳐버린다면 말이다. 성찬의 시간은 깊은 교제의 시간과 같다. 우리 일상에서 변화의 시간으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전환점이 된다.
로렌스 형제의 편지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닥친 고난이 일상의 삶에 얼마나 유익인지 알 수 있다. 성찬은 감사이자 축복의 시간이다. “이 시련의 한복판에서도 자네에게 힘과 인내하는 마음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그것이야말로 그분께서 자네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완벽한 증거 아니겠는가. 그분의 사랑을 생각하며 힘을 내게나. 범사에 그분께 감사드리고.” 일상에서의 성찬은 좋은 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로도 나타난다. 예를 들면 어떤 상을 받았거나, 승진을 했거나 어떤 사람으로부터 원하던 금전적인 도움을 받은 일들은 좋은 일에 속할 것이다. 반면 자녀가 많이 아프다거나, 갑자기 넘어져 다친다거나, 또는 친한 친척이 갑자기 병에 거릴거나 혹 죽었다거나, 또는 금전적 손해를 많이 본 경우들은 안 좋은 일에 속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들은 일상의 삶과는 다른 특별한 일이며, 오늘이라는 일상 예배의 성찬의 시간이다. 이 특별한 일들을 통해 하나님을 더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경건의 시간이기도 하다. 역설적으로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방법들은 분명 많은 제약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분명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고 우리의 예배를 받아주시는 창조주 아버지시란 것을 분명히 믿음으로 인식한다면, 이런 일들은 분명 하나님의 특별한 말씀인 일상의 성찬이다. 참된 예배자는 성찬의 시간이 두렵지 않다. 오히려 감사하고 순종하는 자세를 취한다.
성경의 많은 예배자들도 하나님의 특별한 메시지들을 분명히 인식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삭을 제단에 바친 일,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간 일, 노아가 산에 방주를 지음으로 세상 사람들의 비판을 받은 일 등 너무나 많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순종했으며, 하나님의 음성으로 믿고 기쁘게 나아갈 수 있었다.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히 11:6). 반면 예배자가 아닌 자들에게 성찬의 시간은 무의미하다. 모든 성찬의 시간은 하나님과의 만남과 말씀 속에서의 교제가 있고 나서의 다음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우리 예배자에게 일상의 성찬은 축복이며 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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