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머 헐버트 선교사
호머 헐버트 선교사 ©보훈처 제공

부산지역 초등학생들이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호머 베잘렐 헐버트 선교사(Homer Bezaleel Hulbert, 1950년 독립장)의 훈격을 높여달라고 요청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부산 동신초등학교 6학년 학생 24명은 17일 오전 훈격 상향 청원서를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에게 전달했다. 이어 박 처장과 함께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정된 헐버트 박사 묘소를 참배했다.

이번 만남은 동신초 학생들이 학교에서 ‘독립운동의 발자취’라는 주제로 학습을 받던 도중,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훈격 재논의 관련 기사를 보고 지난 4월 훈격 상향 청원서를 국가보훈처로 보내 성사됐다.

학생들은 청원서에서 “웬만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해 주시고, 한국을 위해 자신의 모든 청춘을 바쳐주신 헐버트 박사님”, “솔직히 다른 나라에 와 누가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 사람들도 하기 힘든 일을 호머 헐버트 박사님은 다했습니다”라고 썼다.

헐버트 박사는 1907년 5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 고종황제의 친서를 각 나라 지도자들에게 전하며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했다. 또 일제의 조선 침략과 만행을 알리고자 ‘한국평론’지에 실었던 기사들을 발췌해 ‘한국에서 일본인’을 제작·보급했다. 헐버트 박사는 1911년 당시 일제의 조선 기독교 단체의 독립활동을 탄압하고자 조작 날조한 ‘105인 사건’ 등을 뉴욕헤럴드에 폭로하기도 했다. 1919년 파리 강화회의 기간 또중 김규식과 여운홍의 한국 독립 청원 외교활동도 도왔다.

1919년 9월 28일, 헐버트 박사는 시카고 청년회에서 강연 하는 등 미국 각 지역 소재 교회와 기독교 단체 등지를 돌며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한국의 독립을 미국이 도와야 한다고 설파했다. 헐버트 박사는 이어 1924년 4월 중순부터 130일 동안 태평양 연안 110곳에서 한국 사정을 소개하는 순회강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한국의 해방은 정의와 인도주의의 승리’라고 기뻐한 헐버트 박사는 1949년 8월 5일 사망했다. 평소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에 따라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됐다.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195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한편, 국가보훈처는 역사학계와 법조계, 언론계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해 ‘독립유공자 훈격을 위한 공적 재평가’ 방안을 모색하고자 ‘독립운동 훈격 국민공감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은 “우리 학생들이 독립의 역사와 그 역사의 현장에서 헌신한 독립유공자들의 생애와 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해 나가고자 하는 노력을 매우 의미있게 생각한다”라며 “앞으로 독립운동 훈격 국민공감위원회를 통해 다양한 의견과 논의를 통해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독립유공자 훈격 재평가 방안을 마련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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