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나이 개념의 창시자인 마이클 로이젠과 영혼까지 어루만지는 의사로 칭송받는 메멧 오즈가 쓴 『내 몸 사용 설명서』(You the owner's manual)는 100세까지 녹슬지 않는 몸을 만들라고 쓴 인체 매뉴얼이다. 뉴욕 타임즈 최장기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책인데 이 책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인생, 자기 몸, 그거 하나 제대로 모르고 있다”며 “내 몸의 주인은 바로 나! 그래서 자기 몸을 제대로 알라”고 한다.
그리고 10가지 지침을 주는데 그중 5가지만 잘 지켜도 건강하고 성공적인 생(生)을 살 수 있다고 한다. 그 다섯 가지는 혈압조절, 금연, 날마다 30분 운동, 적절한 영양 섭취, 스트레스 받지 않기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환경에 의해 인간이 사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아니다. 생각해보면 환경이 어려울 때 더 건강했고, 인격적으로도 더 훌륭했다. 인생 매뉴얼은 스트레스가 환경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믿음의 문제라고 했다. 사람은 믿는 만큼 사는데 ‘뭘 믿고 사느냐?’ 거기에서 인생의 운명은 결정된다는 것이다.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바로 하나님”(1절)이라 선언하고,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그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은 바 되었다(2-3절)고 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그리스도를 누구라 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 깊이 알고, 예수님과의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 만남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복음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증거하고,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요 주님, 그리고 우리의 왕이자 심판자이시라고 고백하게 한다. 여기까지는 우리의 익숙한 일반적인 신앙고백들, 요한복음서나 공관복음서가 여기까지는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비교 불가가 있다. 예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이다. 열 두 제자 중 막내이기도 했고, 베드로, 야고보와 더불어 핵심 멤버(inner circle member), 가장 지근거리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요한은 입만 열면 ‘사랑’을 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한 마디로 ‘사랑의 사도’였다. 그래서 다른 성경도 그렇게 읽어야 하지만 요한복음은 특히 사건마다 사랑의 문맥(context)으로 읽어야 한다. 마치 연애편지를 읽는 심정으로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요한은 복음서를 우리가 일반적으로 잘 하지 않는 신앙고백으로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3절). 이 고백은 요한만의 고백이 아니다. 바울도 같은 고백을 했다.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8:6). 또 히브리서 기자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1:2).
일반 성도들에게는 예수님을 모든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로 고백하는 것이 좀 낯설 수도 있다. 사도신경을 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성도들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사도신경만 보면 천지창조는 성부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단 1도 관여하시지 않는다. 사도신경의 예수님은 그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고 고난받고 십자가 지고 죽고 부활하신 분이다.
이건 사실 교회의 오랜 전통과도 맞지 않는다. 흔히 교회력이라 하면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부터 시작하지만 동방의 교회력인 비잔틴 카렌더에는 9월 1일을 창조절이라 하여 이때부터 신년이 시작된다. 중세 때의 천문학과 관련하여 천지창조의 기점을 9월 1일로 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을 성탄절이 아니라 창조절부터로 보는 것이다. 현대 교회 중 그리스나 러시아 정교회에서도 9월 1일이 교회력의 시작이다. 그래서 정교회의 교황에 해당하는 콘스탄티노플 대주교가 이때 신년 메시지를 발표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창조주 하나님으로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난 한 사람을 향하여 이분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이 보통 일인가? 엄청난 고백 아닌가? 요한이 지금 이 엄청난 고백을 하고 있다.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가 얼마나 크나? 지구만 해도 엄청나다. 비행기로 10시간 이상 논스톱으로 달려야 미국 가고, 30시간 정도 달려야 브라질, 아르헨티나를 갈 수 있다. 그런데 태양은 지구보다 109배나 더 크다. 태양계가 속한 은하계의 크기는 지름이 10만 광년, 빛의 속도로 10만 년을 달려야 도달하는 거리다. 우주에는 이런 은하계 같은 것이 1천 7백억 개나 있다고 한다. 이런 무한한 우주를 만드신 분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지구를 방문하셨고, 인간이 되셨다는 것, 어떻게 이런 어마어마한 선언을 할 수 었었을까? 현대과학 시대에 너무 황당한 고백, 말도 안 되는 고백 아닌가?
그런데 현대과학의 우주론은 황당하지 않나? 빅뱅과 함께 우주가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빅뱅을 일으킨 최초의 물질 또는 존재는 무엇이었는지, 과학에서는 이 최초의 물질이나 존재를 그저 특이점이라 부르는데 현대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뜻 아닌가? 부피는 0에 가깝고 밀도는 무한대라고? 이게 가능한가? 크기를 따질 수 없지만 그 크기가 원자핵만 했다고 한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한 점이 대폭발을 하면서 이렇게 엄청난 우주가 생겼다는 게 황당하지 않나? 말이 안 되는 것 아닌가?
현대과학은 우주의 탄생을 막연하고 우연한 것으로부터 출발했다고 하지만 성경은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겼다고 한다. ‘말미암아’는 헬라어로 ‘디아’(δια), 영어의 ‘through’다. 요한의 선언대로 그리스도가 창조주라면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의 창조와 그 사랑의 손길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막연하고 우연한 것이 아니라 우주의 시작에 하나님의 계획과 사랑이 있었다는 말이다.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랑 가운데 계획되고 디자인되어 만들어졌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찬양한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8:4). 하나님께서 생각하셨다는 것, 이게 바로 인간이 고귀한 이유다. 인간의 위대함은 하나님이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방문이라는 그 큰 사랑으로 인해 지구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별들 중 가장 빛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나도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는 말씀, 예수님은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다. 시편 139편에 보면 다윗은 자신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높이 찬양한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13-14절).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그 무한한 능력, 그 놀라운 지혜와 지식 안에 내가 깊이 흡수되어 있음을 발견해야 한다.
다윗은 찬양을 이렇게 시작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1절), ‘주님이 아신다.’ 창조주, 즉 나를 지은 분으로 아신다는 말이다. 창조주보다 나를 잘 아는 분이 누가 또 있겠나? 그래서 다윗은 시종 그 사실을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내가 조성되기 전에, 내 생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때부터 내 운명, 내 종말, 내 한순간의 생각까지 다 알고 계신다며 그래서 전지전능하시다고 한다.
하나 '하나님이 다 아신다'는 말에 마음이 평안하면 건강한 것이지만 마음이 두려우면 불편할 것이다. 두려운 이유가 뭔가? 바로 죄 때문이다. 또 ‘하나님도 모른다’. ‘이 사정은 하나님도 아시지 못한다’ 그러면 그것도 문제가 있을 것 아닌가?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아신다’는 이 사실이 기쁨이 되고 힘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고백에 근거해서 보면 우연은 없다. 내가 어떻게 우연으로 생겼겠나? 오히려 진화론이 우연이다. 말이 안 되는 비논리, 불합리, 비과학이다. 그냥 저절로 좋게 진보한다는 그런 모순이 어디 있나? 그런데도 현대인들이 절대적 창조론보다 상대적 진화론을 더 선호한다. 이유는 하나님의 간섭을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창조를 인정하면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부인해야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규칙과 규제를 거부한다. 사도 바울이 지적하듯이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현상이다(롬1:28).
그런데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친다. 그 결과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이 비윤리, 부도덕, 성개방, 호모섹스, 레즈비언, 마약, 도박문화, 극단적 이기주의 등 무질서와 혼돈으로 바뀌고 말았다. 진화론은 절대 기준을 무너뜨린 포스트모더니즘을 낳았다. 모든 것이 역기능적, 하나님을 떠난 사람일수록 비정상을 즐긴다(롬1:26-32).
기억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계획, 설계, 목적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계획된 인생,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명품 인생이다. 다윗은 이 감격을 수사학적으로 화려하게 표현한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15-17절) 나를 완벽하게 디자인하신 하나님이시기에 내 인생을 최상으로 이끌어 가실 것이라는 고백이다. 다윗은 창조의 신비에 감탄하다가 인생이 신묘막측(神妙莫測)하다고 노래한다. 신묘망측이 아니다. 내 몸이 신묘막측하게 디자인되었다면, 내 인생의 미래도 신묘막측하게 디자인된 것, 생각할수록 엄청난 사랑이다. 그렇다. 창조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는 요한의 고백은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최고 명품으로 지으셨다”는 고백을 담은 것이다.
어떤 이는 인생을 5가지 동사로 요약된다고 했다. 그것은 to want ‘무엇을 기대하며 사는가’ to have ‘무엇을 소유하고 사는가’, to run ‘무엇을 위해 뛰고 있는가’, to love 무엇을 사랑하며 사는가, to believe ‘무엇을 믿으며 사는가’라 했는데 맞다. 그 가운데 우리는 to love, 인생은 사랑한 만큼만 살고, to believe, 인생은 믿는 만큼 산다는 것을 더 깊이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오죽하면 개 키우는 사람이 이렇게 많을까 생각해야 한다. 개 키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닌데 그래도 키우는 이유가 개는 배신하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자식도 배신하는데 개는 끝까지 자기를 믿어 준다는 거다. 그래서 애완견도 아니고 반려견이라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이 할 소리는 아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만큼 살고, 믿은 만큼 산다. 소유가 아니다. 그리고 욕망도 아니다. 남는 것은 사랑이고 믿음이다. 창조주 하나님, 나를 지으시고, 그래서 나를 아시는 하나님,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믿고 주님의 인도하심 따라 살아야 한다.
나의 모든 것 되신 주님(Christ is all)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3절) 요한은 말씀, 즉 그가 없이는 하나도 된 것이 없다고 했다. 그가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고백이다(Without Christ, I am nothing).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모든 것 !’(Christ is all)이라고 고백하고 싶다. 비싼 명품 오르간도 전원 연결이 안 되면 소용이 없듯이 예수님은 우리의 절대 필수(absolute necessity),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은 그런 분이 아니다. 우리는 원래 세상의 것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주께서 주시는 힘으로 사는 존재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산다는 것이다. 사탄은 스스로 살 수 없음에도 스스로 살 수 있는 것처럼 자꾸 인간을 속인다. 그래서 도토리를 주워 먹는 멧돼지가 도토리가 땅에서 나오는 줄 알고 땅을 파듯이 사람들은 이 땅의 것이 잘되면 만사형통인 줄로 착각하고 그저 땅만 판다.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실 때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도록 만드셨기 때문이다. 기억하라.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믿음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엄청난 역사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면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친히 찾아오셨다. 우리를 높이기 위해 친히 낮아지셨고,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해 정작 자신은 가난해지셨다. 또 우리에게 영적 양식을 주기 위해 당신이 주리셨고, 우리로 구원의 물을 마시게 하기 위해 당신은 목마르셨다. 그뿐인가?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되게 하기 위해 기꺼이 종이 되시고, 우리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 자신은 피곤하셨다. 기쁨을 주기 위해 슬픔을 당하시고, 자유를 주기 위해 구속당하시고, 의롭게 하기 위해 당신은 정죄당하셨다. 그리고 결국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죽기까지 하셨고, 우리를 하늘 처소로 올리기 위해 다시 내려오실 분이다. 우리를 최고의 명품 인생 되게 하신 은혜를 기억하며 살 뿐만 아니라 그분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늘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인천 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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