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지 않은 크리스천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성찬 예식에 부담을 느낀다고 말한다. 크리스천이라면 성찬식을 진행하는 주일에는 ‘혹시 예배가 늦게 끝나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예배가 줄지어 있는 대형교회일수록 정해진 시간에 예배를 마치려면 성찬이 있는 주일은 설교 말씀을 조금 줄인다든지 아니면 다른 시간을 줄여야만 하는 부담이 앞설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예배는 성찬이 점점 부담되는 시간으로 약화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신약에는 예배의 정형화된 모습을 찾기 어렵고 파편적으로 소개되어 있지만 초대교회 예배의 모습을 다음 말씀에서 일견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2-47)
초대교회 예배의 두 가지 구조는 ‘말씀’과 ‘성찬’이었다. 고린도전서 16장 20-24에는 말씀의 예배 후에 주의 만찬의 예배가 드려졌음을 알 수 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사도들이 전하는 말씀을 나누고 떡을 떼며 그들의 신앙을 유지해나갔다. 중요한 것은 46절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로 성찬을 진행하면서 기쁨이 넘쳤다는 사실이다. 분명 초대교회 예배에서의 성찬은 예식의 의무이기 전에 기쁨이 넘치는 실제적인 예식이었다.
누가복음 24:14-32의 내용은 우리가 잘 아는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제자)’ 말씀이다. 물론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던 찬양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의 배경이다. 열두 제자는 아니지만 다른 제자라고 알려져 있는데 한 사람의 이름이 글로바다.
처음 예수님께서 그들과 동행했으나 그들이 알아보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눅 24:13-16)
하지만 30절과 31절 말씀을 주목하자.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말씀과 뒤에 나오는 35절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말씀은 성찬 예식이 피상적인 형식적 예식이 아닌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놀라운 능력을 경험한다는 사실이다.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떡을 떼는 성찬 예식은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심과 보혈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통로였다.
로버트 웨버는 이 말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떡을 떼는 것은 단지 예수의 죽음을 시무룩하고 건조하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에 대한 훌륭한 기념이자 축제이다.”
성찬은 이렇게 중요한 예배 예식임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약해져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1년에 단 몇 차례 형식적인 예식으로는 참된 성찬의 능력을 회복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예배의 중요한 예식을 빠뜨리는 우를 범하는 것이 된다. 성찬은 환경과 여건에 따라 예배 순서에 넣고 안 넣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적인 성경적 본질이다. 성찬은 분명 교회와 예배 공동체가 회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예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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