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복음주의협의회(대표회장 임석순 목사, 이하 한복협)가 ‘3.1운동 정신과 오늘의 대한민국’이라는 주제로 3월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를 10일 아침 양재 온누리교회(담임 이재훈 목사)에서 개최했다.
먼저 발제자로 나선 김명섭 교수(연세대 정치외교학과)는 ‘3.1운동과 국제정치 그리고 오늘의 대한민국’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김 교수는 “1919년 3.1운동은 1910년 한일합병 이후 1914년부터 18년까지 발생했던 1차 세계대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세계대전으로 약 1300만 명이 사망했다. 이후 열린 파리 강화회의는 전쟁 부상자 보상, 전후 영토 재편 등 여러 문제를 논의하고자 1919년 1월 18일 개최됐다. 이 회의는 3.1운동을 분출하게 된 결정적 계기”라고 했다.
이어 “당시 파리 강화회의 의장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Woodrow Wilson, 1856-1924)는 민족자결주의를 내걸었다. 그는 평화란 각 지역 민족의 영토 확보와 국경 분리로 유지될 수 있고, 제국주의는 국가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규정하면서, 민족적 자율성 보장을 주장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1918년 11월 상해 외국인 조계지를 방문한 윌슨 대통령 측근 크레인(Charlse R. Crane, 1858-1939)이 여운형을 만나면서 민족자결주의는 상해 거주 대한인들에게 알려졌다. 곧바로 이듬해인 1919년 2월 8일 동경 YWCA 대한인 유학생들에게 알려져 독립선언이 발표됐다”고 했다.
아울러 “우드로 윌슨이 이승만의 직속 스승이라는 점도 재미 대한인들 사이에서 부각이 됐다. 때문에 재미 대한인들은 이승만을 파리회의에 파견하기로 했지만, 미국 시민권이 없던 이승만은 파리로 갈 수 없었고, 대신 이승만은 안창호·서재필 등과 함께 1919년 3월 1일 운동 거사 이전인 2월 13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대한인들의 항일 행진을 진행했다”며 “이러한 활동은 개신교 네트워크를 통해 이뤄졌다”고 했다.
김 교수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개신교인이었다. 이것의 뿌리는 1907년 자발적인 평양 대부흥”이라며 “1910년 당시 시작된 일본의 억압 통치와 근대 문물의 대거 유입에 따른 물질 숭배 정신이 대한민국 민중들 사이에서 팽배했다. 이 두 가지는 1910년 한일합병 직후 항일 투쟁을 즉각 촉발하기 어렵게 한 측면이 있었다. 개신교는 이것을 극복하고 ‘가치중심주의’를 민중들에게 확산시킨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라고 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국제사회 원칙인 ‘독립주권의 상호평등’ 주의는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촉발된 ‘웨스트팔리아 원칙’에서 출발했다”며 “당시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발표로 가톨릭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를 파문했다. 영주들은 가톨릭과 개신교계 진영으로 양분됐고, 1572년 프랑스 위그노 전쟁에 이어 1618년부터 독일에서 ‘30년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 종식을 합의한 가톨릭과 개신교 진영은 군주들 간 경계령 설정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웨스트팔리아 원칙’이 확립됐다. 종교개혁이 오늘날 ‘독립주권의 상호존중’에 기초한 국제사회의 발전을 촉진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김명섭 교수는 “이러한 독립주권 원칙을 토대로 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자결주의’라는 세계사적 흐름에 편승하고자 촉발됐던 3.1 운동은 그 결과로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며 “상해 임시정부는 상해의 프랑스 조계지 안에서 창립했다. 상해 임시정부가 중국 공산당, 중화민국 장개석의 도움을 받았다는 일각의 주장은 낭설이다. 다만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설된 이유는 당시 국제 정치 흐름를 반영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는 임시헌장 제7조에서 ‘대한민국은 신(God)의 의사에 의해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고 나아가 인류문화 및 평화에 공헌하기 위해 국제연맹에 가입함’을 명시하고 있다”며 “상해 프랑스 조계는 이러한 성격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적합한 공간이었다”고 했다.
또한 “당시 상해 프랑스 조계는 금융·통신·외교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었다. 프랑스는 1789년 ‘프랑스혁명’을 기점으로 ‘국민주권사상’에 입각한 ‘집회와 결사의 자유 보장’을 국가적 정체성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프랑스는 당시 ‘상해 임시정부에 대한 방해 공작을 한다면 대가를 수여하겠다’ 등 일제의 외교적 요청도 거부했다. 이는 프랑스가 임시정부에 대한 자유 보장이 곧 ‘국민주권사상’에 입각한 집회와 결사의 자유 보장의 일환으로서, 국가적 이익을 뛰어넘는 국가적 정체성에 해당하는 사안이라고 봤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1897년 대한제국 수립,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1948년 대한민국 독립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조선’에서 ‘대한’으로 진보해온 역사이기도 하다. 이 과정의 중심엔 개신교가 있었다”며 “개신교는 유럽의 종교만도, 중동 이스라엘 유대교에서 갈라진 종교만도 아닌, 독립정신을 내포한 하나의 보편종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1946년 3.1절은 대한독립촉성 세력과 평양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민공화국지지 세력의 격돌의 장이 됐다“며 ”지금 대한민국이 겪는 혼란의 원인 중 하나도 ‘대한민국’이라는 정체성 인식의 부재다. 대학과 교회가 이를 반성하고 국가적 정체성에 대한 교육을 정확히 해야 한다”고 했다.
정운형 교수(연세대 연합신대학대학원 객원)는 ‘3.1운동과 오늘의 한국교회’라는 주제의 발제에서 “개신교는 1919년 3.1운동을 통해 일본의 식민 지배 거부를 표명했다”고 했다.
이어 “약 3만여 개의 문헌에 따르면, 3.1운동 당시 대한민국 인구 1600만 명 중 개신교인이 25만 명이었다. 3.1운동 전체 시위 참가는 106만 명이었다. 그러나 개신교 신자의 피해 현황이 제일로 컸다. 개신교 신자의 체포·투옥은 2,087건에 달해 모든 종교·부류·단체 중 가장 많았다, 재산상 피해도 가옥 724채, 교회 59채가 불타 가장 피해를 많이 입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교회는 박해를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절대적 희생양을 드러내는 종교다. 예수는 자발적으로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셨다. 이 때문에 3.1운동에 참여한 교회와 목회자들은 세상 속 빛과 소금의 역할로, 일제 박해를 완강히 거부하고 자신을 기꺼이 희생했다”며 “이런 역할은 지금 개신교계에도 요구된다”고 했다.
정 교수는 “3.1운동 이후에도 교세는 확장됐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1918년 당시 교회 2,951개, 교인 218,848명이었지만, 1920년 교회 2,970개, 교인 219,500명에서 1925년 교회 3,580개, 교인 262,095명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했다”며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는 교세축소에 직면했다. 각 신대원의 입학 현황도 낮다”고 했다.
정 교수는 “모세가 권력자 ‘바로’ 왕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 수 있었던 이유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에 기초해, 생명의 근원이 권력자가 아닌 하나님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라며 “한국교회도 모세의 태도를 본받아 정치적 권력 등에 휘둘리지 말고, 하나님 말씀을 올곧게 순종하길 바란다”고 했다.
한복협 대표회장 임석순 목사는 “지금 한국교회는 힘의 논리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며 “그러나 3.1운동은 그리스도의 희생적 논리에 입각해 진행된 결과”라고 했다.
이어 한 청중이 ‘3.1운동도 개신교가 타종교와 연합한 운동이었다면, 지금 한국교회의 종교 간 대화의 방향성’에 관해 질문하자, 김명섭 교수는 “종교 간 대화는 필요하겠지만 종교적 교리의 혼합은 거절해야 한다”며 “다양한 종교의 존재적 이유는 각자 종교들의 교리와 정체성을 굳건히 견지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일제 강점기 당시 3.1운동, 병원·학교 설립 등은 기독교 복음의 본질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선교사들이 병원을 세우기 위해 일제 강점기 당시 대한민국에 입국했던 것은 아니”라며 “이처럼 종교 스스로가 정체성을 분명히 할 때 자긍심도 자연스럽게 나올 것”이라고 했다.
앞서 1부 예배에선 오정호 목사(한복협 부회장, 대전 새로남교회 담임)의 설교, 여주봉 목사(한복협 중앙위원, 포도나무교회 담임), 이윤희 목사(한복협 중앙위원, 전 한국군종목사단장)의 기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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