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자신의 아들이 트랜스젠더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 아버지와 전화 통화를 했다. 그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트랜스젠더가 되어 이름까지 여자 이름으로 바꿔 버렸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전화 통화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아빠, 나는 하나님이 두려워. 나는 분명히 지옥에 갈거야.”라는 말을 자주한다고 했다. 나는 그 아들이 얼마나 훌륭한 신앙인의 가정에서 성장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내게도 그 소식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전화 통화를 끊고도 그 아들의 말이 제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아빠 나는 하나님이 너무 무서워. 나는 분명히 지옥에 갈거야”
이 아이가 하나님을 이토록 무서워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아이는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을 분노하게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두렵고 자신이 지옥에 갈까 두려운 것이다. 트랜스젠더가 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모습은 분노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제가 그 아버지와의 전화 통화에서 한 가지 인상 깊었던 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그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저는 자기 아들을 향한 어떤 분노나 절망의 기운도 느낄 수 없었다. 그 아버지의 목소리를 통해서 제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하나. 그것은 자기 아들을 향한 “사랑”이었다. 비록 자신의 아들이 트랜스젠더가 되었지만 그 사실이 그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에는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그를 사랑하게 만들고 있었다.
저는 그 아버지와의 전화 통화를 통해 사랑의 신비, 사랑의 힘을 느꼈다. 사랑은 윤리를 넘어선다. 사랑은 수치를 넘어서고, 분노를 넘어선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이 아버지의 사랑도 이럴진데, 하물며 이 아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어떨까?” 이 아들이 자기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된다면, 이 아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을까? 이 아들의 강력하고도 무서운 죄의 결박을 끊어내는 힘은 “윤리 교육”으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요, “심판의 위협”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다. 이 아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하는 것, 이것 하나만이 이 아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행하신 방법이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17)
이 아들은 자신이 하나님께 얼마나 혐오스러운 일을 했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철저한 신앙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였으니 트랜스젠더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라는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동성애를 비롯한 성적인 음란 때문에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트랜스젠더가 되어 버린 자기 자신을 결코 받아 주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며, 그래서 그가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너무도 고통스럽고 두려운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저는 그 아들을 만나게 된다면, 다른 모든 이야기를 제쳐 놓고 이것 한 가지만을 분명하게 말해 주고 싶었다. “하나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사실 만은 네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고.”
어느 부자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둘째 아들이 하루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물려줄 것을 요구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 이것은 정말 충격적인 요구다. 아버지는 너무나 슬픈 마음으로 재산의 절반을 나누어 주었고, 그 아들은 유산을 챙겨 머나먼 타국으로 떠난다. 그는 그 곳에서 가진 것을 모두 탕진하고 황폐한 삶을 살며 돼지 먹이는 일을 한다. 어느 날 그는 돼지들 틈에 앉아 떠나온 집을 회상하게 된다. 그리고 불현듯 아버지 집에서는 하인들조차 지금의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아버지가 자신을 받아줄 리가 없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무척 분노하고 계실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께 돌아가 용서를 구하고 “아들”이 아닌 “하인”으로 일하겠다고 마음 먹는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가는데,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 장면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읽어야겠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15:20)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눅15:21)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눅15:22-24)
“심판”이 아니라 “축제”가 벌어진 것이다. 이 탕자의 비유는 “충격적인 아들의 만행”으로 시작하여 “충격적인 아버지의 사랑”으로 마무리 된다. 이 비유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고자 하는 복음의 정수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이와 같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망각하고 있다.
나는 트랜스젠더가 되어 버린 그 아들을 만나게 되면 꼭 이 탕자의 비유를 전해 주고 싶다. 아버지가 탕자를 만나기 위해 달려가 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모습을 설명해 주면서, 하나님은 트랜스젠더의 모습으로 변화된 너 때문에 분노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너무나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꼭 전해 주고 싶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다.
만약에 우리 가운데 나 자신이 트랜스젠더가 된 이 아들보다 더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이 트랜스젠더 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무조건적인 사랑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탕자의 형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와 같은 무조건적인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다. 이 사랑이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갈망하게 만드는 힘이다. 이 사랑이 나의 길을 고집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을 갈망하게 만드는 힘이다. 이 사랑이 내 삶의 주도권을 내가 쥐고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내 삶의 모든 주도권을 하나님에게 이양하고, 하나님의 손에 나의 삶을 완전히 의탁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깨달은 자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갈망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음성이란 무엇인가?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고백이다. 이 사랑을 받아들여라. 그 때 우리는 안심하고 하나님의 뜻에 완전하고 온전하게 우리의 모든 삶의 주도권을 이양할 수 있다. 내 삶의 뜻과 계획과 길을 온전하게 하나님의 손에 의탁할 수 있다.
바로 이 하나님의 음성이 나의 길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길, 나의 생각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생각을 갈망하고 사모하게 만드는, 나의 완악한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해독제다. 나의 이 완악한 마음이 치유를 받아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내 마음 속에서 레에마로 나타나실 수 있다.
슬기로운 신앙 생활의 원리 - “시동의 원리”, “씨앗의 원리”, “축적의 원리”, “반사의 원리”에 이어서 마지막 결정적으로 중요한 원리, 그것은 바로 “사랑의 원리”다.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정말로 내가 신뢰한다면, 나는 죽기까지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진심으로 갈망하고 사모할 수 있는 것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8:35-37)
이태희 목사(그안에진리교회 담임, 윌버포스 크리스천 스쿨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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