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기간 동안 남한 내 기독교인 1,145명이 북한 공산당원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는 공식적인 연구결과가 나왔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박명수 교수팀에 의뢰해 지난해 10월 ‘한국전쟁 전후 기독교 탄압과 학살 연구’라는 제목의 연구 보고서를 발간하고 이 같이 밝혔다.
이에 따르면, 개신교인 1,026명·천주교인 119명이 한국전쟁 기간 중 공산당원에 의해 학살당했다. 정부자료 등 문헌자료와 관련자 증언을 토대로 작성된 위 보고서는 충북 논산, 전북 군산·고창, 경기 철원 등지에서 약 60여개 교회가 피해를 입었다고 전했다.
보고서는 해방 정국 이후 한국 기독교는 정치 참여파와 정교 분리파로 양분돼, 각각 대한민국 건국과 교회 재건을 위한 노력에 나섰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모두 좌익의 공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기존 연구들이 한국전쟁 가운데서 기독교인의 학살을 다루지 않은 이유도 덧붙였다.
보고서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독립촉성국민회 등 우익단체에 참여해 이후 공산당원에 의해 살해당했지만 이를 정치적인 범주로 분류해 그간 연구결과에서 배제된 측면이 강했다”며 “그러나 공산주의와 신앙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이들의 정치참여는 결국 신앙이 중요한 원인이 된다. 또한 정치와 관계가 없는 기독교인들도 근본적으로 반공 주의자였기에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은 내각비상회의에서 ‘전체 인민들은 간첩, 불순 이색분자들과의 투쟁을 강화해 그들을 모조리 적발할 것’과 그해 7월 중순 ‘전직 전과 불량자, 악질종교 등’을 처벌하라고 명령했으며 여기엔 기독교인도 포함됐음은 자명한 사실”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국 전쟁 시기 북한 당국의 공식적인 지시로 기독교인의 숙청은 대부분 제대로 된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이뤄졌다”며 “위에 대해 법적인 절차를 지키라는 북한의 명령은 1950년 11월 23일에 내려졌다. 내무상 방학세는 각 도 내무부방 등에 내린 지령에서 ‘반동분자를 취급·처리함에 있어서 일부 지방 일꾼들은 법적 근거도 규명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고려 없이 난폭한 방법으로 처단하는 사실이 적지 않음으로 앞으로 이를 단속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명령 한다’고 적었다. 이것은 북한당국이 공식적으로 불법적으로 잔혹한 학살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기독교를 불순세력으로 규정하고 탄압했다”고 했다.
이어 “한국전쟁 초창기, 파죽지세로 남한을 점령하던 인민군들이 낙동강 전선에 모든 역량을 투입하자 공백이 생긴 중부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수립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5일, 성공을 거두게 됐다”며 “이에 유엔군과 국군들은 여러 통로를 통해 북진했고 전세가 불리해진 인민군은 퇴각 명령을 내리면서 그해 9월 26일 추석을 기점으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이 이뤄졌다. 이 가운데 기독교인에 대한 학살도 포함됐다”고 했다.
대표적인 피해 교회로는 충남 논산 병촌교회, 전북 군산 원당교회·해성교회·지경교회, 전남 신안군 증도교회 등을 제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충남 논산 병촌교회에서 살해된 교회 신자 66명은 반공의식이 강했지만 우익의 정치활동에 참여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원래 강경성결교회가 자리했던 병촌교회는 성결교 교리에 따라 그리스도의 재림을 신앙의 중요한 요소로 봤으며 공산주의를 말세에 등장하는 붉은 용 곧 적그리스도로 생각했다”며 “그러나 교회가 위치한 논산군 성동면은 한국전쟁 당시 남한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좌익 세력이 활발히 활동했었고 이 지역에서 병촌교회 교인을 포함해 120명이 살해당했다. 이 지역과 가까운 강경면에서 해방 이후 침례교 초대 총회장을 지낸 이종덕 목사도 9월 말 인민군이 퇴각하는 가운데서 살해당했다”고 했다.
또 전북 완주군의 제내교회 등 교회 3곳에서 14명이 공산당원에 의해 살해당했는데, 대부분 우익단체에 가담한 전력이 없는 평범한 신자들이었다고 한다. 보고서는 “교회가 사랑으로 대했던 조한봉 등 이 지역의 좌익 세력은 그럼에도 기독교를 적대세력 간주했다”고 전했다.
전북 군산의 정연행 여성 전도사에 대한 일화도 전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정연행은 이 지역에서 원당교회(1927년)·해성교회(1928년)을 세운 뒤 전북 여전도회 연합회장으로 활동할 만큼 기독교적 리더십을 갖춘 여성 인물이었다. 해방 직후 제4사단 공산당 세력은 군산을 장악하면서 원당교회를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사용한 채로 정연행 전도사에게 ‘예수 믿지 말고 여성위원장이 되어줄 것’을 요구했다. 이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주변의 피난 권유에도 불구하고, 정 전도사는 “다 피난가면 누가 이 교회를 지키겠느냐? 일제 강점기 때도 신사참배를 믿음으로 이겼으니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교회를 지키겠다”며 거부했다고 한다.
보고서는 “목격담에 따르면, 공산당원들이 정연행 전도사에게 죽창과 총칼을 들이대며 ‘지금이라도 예수를 모른다고 말만 해라. 그러면 살려주마’라고 회유했다고 한다”며 “그러나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그녀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살해당한 뒤 일본군이 파놓았던 방공호에 매립됐다”고 전했다. 이에 따르면, 원당교회 신자 14명, 해성교회 7명 등 21명과 근처 지경교회 소속 신자 9명이 살해됐다.
전남 신안의 문준경 전도사에 대해서도 “18세 시집을 갔으나 자식을 낳지 못하고 32살 때 남편이 새 아내를 맞이한 슬픔을 뒤로한 채 성결교회의 전도사가 돼 이후 신안군 소재 섬 곳곳에 교회를 개척했다”며 “그러나 당시 공산주의의 등장으로 심각한 사상적 혼란 가운데서 성결교회는 강력한 반공의 입장을 견지했었다. 문준경 등 신안 지역 목회자들은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피면서 기독교의 이웃사랑을 몸으로 실천하고자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후 1950년 10월 4일, 이봉성 전도사의 만류에도 전남 신안군 증동리로 돌아간 문준경 전도사는 공산당원에 붙잡혀 다음날인 5일 처형됐다. 그녀의 죄목은 ‘새끼를 많이 깐 암탉’이었다. 함께 처형된 교인들은 20여 명이었다. 신안 임자도에서 그녀가 개척한 교회 중 하나인 진리교회 등 교인 48명이 살해당했고, 특히 신안 임자도 주민 13,000명 가운데 21%인 2,700명이 한국전쟁 중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보고서는 당시 평범한 기독교 신자들이 반공사상에 투철했던 이유로 "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정치활동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기독교인들은 분명한 반공사상을 가졌다. 이들에게 공산주의는 무신론을 주장하는 유물론이다. 이런 생각은 거의 모든 기독교인이 받아들이고 있다“며 ”이런 입장 때문에 한국 기독교는 좌익에게서 박해를 받은 것이다. 충남 병촌, 완주 동상, 신안 임자 등의 신자들을 보면 이들은 특별한 정치활동을 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이들은 집단학살을 당했다“고 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한편으로는 강력한 반공주의적인 모습을 갖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을 사랑으로 포용하려는 이중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며 “기독교인은 무신론을 주장하는 공산주의를 반대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기독교의 복음을 실천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1948년 제주 4·3사건 당시 조남수 목사의 경우 토벌대장 문형순과 협상해 300명의 인명을 살렸고, 150차례의 선무활동을 통하여 그 외에도 많은 인명을 구했다. 이 같은 중재·화해의 노력은 여순사건에서도 드러난다“며 ”널리 알려진 사실로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살해자를 사랑으로 용서하고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인민군이 퇴각하는 과정에서 손양원 목사는 인민군에게 살해됐다“고 했다.
또한 “한국전쟁 가운데서도 기독교공동체는 가능하면 복수로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 일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충남 병촌교회의 경우 가해자를 용서하고 복수하지 않았다. 전북 정읍 두암교회의 경우도 가해자를 찾아가서 용서하고 그들을 기독교 신자로 만들어 같이 신앙생활을 했다”고 했다.
특히 “전남 신안군 임자면 진리교회에서 피살된 이판일의 아들 이인재는 대한민국 해군이 이곳에 진격하면서 보복할 기회를 주었는데, 이것을 거부한 채, 오히려 이 동네의 이장이 돼서 분열된 마을을 하나로 회복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했다.
아울러 “해방 직후 철원제일교회 소속 청년 46명이 조직한 우익단체인 신한청년회(대한청년단) 일부가 한국전쟁 초기 좌익 세력에 의해 학살당한 뒤 9·28일 수복으로 인민군이 퇴각하자 자신들의 동료를 죽인 공산당원들에 복수할 기회를 잡았다”며 “이들은 장흥교회 앞 공회당에서 퇴각한 공산당원이 남긴 가족 100여 명을 공개 처형하기 시작했는데, 장흥교회 담임 서기훈 목사는 청년들에게 ‘십자가의 사랑’을 가르치면서 신자들이 이렇게 행동하면 자신은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장흥교회 신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던 대한청년단원들은 보복을 멈췄고, 서기훈 목사는 보복당한 좌익의 가족들을 방문해 위로했다”며 “1·4 후퇴 때, 이곳을 찾아온 좌익들은 자신들의 가족이 죽지 않은 것을 보고 우익에 복수하지 않았다. 그러나 좌익이 38선 이북으로 밀려나면서 서기훈 목사는 인민군들에게 체포됐고, 1951년 1월 9일 처형당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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