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당시 서구 세계에 철학적 혼란도 심각하였는데, 예를 들어 니체는 진리는 절대적이 아니다(객관성이 없다)라고 하며, 기독교 도덕성은 “약자의 도덕”이며 인간에게 유익보다는 해를 끼쳤다고 주장하였다. 덩다라 일부 지식인들이 등장하여 섹스에 대한 기독교적 규범도 상대적이며, 그래서 동성애도 사회에서 정상으로는 용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와중에, 의학분야에서 동성애를 죄라기보다 병으로 보려는 의사들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소도미(동성애)를 “inversion sex”(반대로 도착된 섹스라는 의미)라고 부르며, 뇌의 병변(퇴화)에 의한 정신장애로 보았다. 당시 모든 정신적인 병은 신경병(뇌병)으로 보았다(우리나라에서도 한 때 정신병원을 뇌병원이라 불렀다). 즉 정신이나 행동이 이상해지는 것은 뇌의 장애 내지 뇌세포의 퇴화(degeneration) 때문이라고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신경병 학자 샤르코(Jean-Martin Charcot 1825-1893)는 동성애를, 히스테리나 간질 같은, 신경정신의학적 퇴행 상태로 보았다. 오스트리아/독일의 정신의학자 크라프트-에빙(Richard F. von Krafft-Ebing 1840–1902)도 동성애를 뇌의 퇴행적 병으로 기술하고 있다(1990년대 동성애를 옹호하는 과학자들은 동성애 특유의 뇌구조가 있으며, 이는 타고나기 때문에 “정상”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에이즈 때문이라는 비판을 듣고 있다).
1869년 헝가리인 저널리스트이자 동성애자인 커트베니(Karl-Maria Kertbeny 1824-1882)가 처음으로 헤테로섹슈얼(heterosexual) 및 호모섹슈얼(homosexual)이란 용어가 사용된 문헌을 출판하였다(또한 그는 자위하는 사람을 monosexualist라 불렀다). 이 새로운 용어들을 당시 저명한 성학자이자 의사인 크라프트-에빙이 1886년 저서 《성병리학》(Psychopathia Sexualis)에서 인용하여 사용하였다. 이후 이 용어가 점차 의학에서 사용되면서 표준이 되었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사회의 전반적인 “진보”적 변화에 따라, 권위(전통적 개념)에 저항적이었던 정신과의사들이 증가하면서, 섹스문제에 있어서도, 종교와 전통적 법과 재판에 대해 구체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과학주의”에 힘입어 동성애에 대한 담론을 죄(sin)와 범죄(crime)의 영역에서 의학적 병리의 영역으로 확대하였다.
당시 정신병 환자는 당연히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의사들은 동성애도 뇌의 병이므로 동성애자는 감옥에서 벌을 받기보다, 체포하되 병원에서 치료를 받도록 했다. 그러면서 의사들은 동성애를 의학적으로 치료하는 방법을 개발하려 하였다. 그 결과가 20세기 초에 성기제거 수술, 성호르몬 투여, 그리고 정신적 치료로서 정신분석, 혐오치료(aversion therapy) 등으로 나타났다.
동성애가 정신병으로 인정되면서 이제 동성애자는 환자로서, 범죄인보다 비난을 덜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역사적 변화는 일반적으로 진보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일반 사회에서는 여전히 동성애가 범죄로 취급되었다(이에 대해 미셀 푸코는 “동성애 억압”의 방법이 종교에서 의학으로 옮겨온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며, 동성애는 병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동성애는 동성(homo)간 성행위(sexuality)이다. 동성간 우정이나 사랑은 동성애가 아니다. 성경에 의거하여 우리 크리스천은 동성간 성행위(소도미)는 "자연에 반하는 행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부인하는 행동으로 본다. 우리 크리스천은 동성간 성행위(소도미)에 대해서는 비판하지만, 동성간 성행위를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차별하지 않는다.
민성길(연세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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