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전직 대통령 두 분이 감옥에 갇혀 있는 아픔을 겪고 있다. 물론 죄의 값은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감옥에서 건강이 악화되고, 제때 치료도 받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게다가 나이도 많은데, 요즘 같은 추운 겨울이 되면 얼마나 더 고될까 하는 애처로운 마음마저 든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바울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후서를 쓸 때 감옥에 갇혀 있었다. 백발의 노년이었다. 게다가 중한 병에 들었다. 언제 순교를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 편지를 쓸 때는 오늘과 같은 매섭고 추운 겨울이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도 언젠가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야 할 때가 있다. 비록 인생의 마지막은 아니더라도 인생의 추운 겨울을 맞을 때가 있을 것이다. 육신의 질병이 찾아올 때가 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할 때가 있다. 어둠의 긴 터널을 지날 때가 있다. 이때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우리가 이때 무엇을 준비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마지막 모습을 통해서 그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첫째는 동역자를 돌아봐야 한다. 바울은 인생의 겨울에 오히려 동역자를 챙기고 있다. 19절이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우리가 잘 알듯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고린도에서 장막을 만들면서 만난 동역자들이다. 그들이 얼마나 친밀한 동역자였냐면 바울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어놓을 정도였다. 오네시보로도 마찬가지이다. 1장 16절에 보면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부지런히 찾아왔던 동역자였다. 그러니 바울도 그가 몸이 성치 않고 오히려 돌봄을 받아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에게 도움을 준 동역자를 챙기라고 디모데에게 부탁하고 있다. 20절에 보면 병들어 있는 드로비모를 꼭 챙기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의 사역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그렇다. 바울은 사람을 남기는 사역을 했던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업적, 성과, 실적으로 평가하곤 한다. 그러나 업적과 성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남겼냐는 것이 되어야 한다.
저도 사역자로서 사역을 하다 보면 업적과 성과를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너무 업적과 성과를 위해서 사역하다 보면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사역하고 있는지를 잊어버릴 때가 있다. 그러면 다시 마음을 잡고 본질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바로 사람을 위한 사역이다. 이러한 분명한 철학이 없으면 사역을 위한 사람이 될 때가 있다. 바울은 그를 위해서 생명을 걸고 헌신했던 동역자가 있었던 것은 그가 사람을 위한 사역을 하였기 가능했던 것이다.
여러분! 업무적인 관계 말고, 사역적인 이유로만이 아니라 정말 인격적인 관계의 동역자가 있는가? 여러분의 인생의 겨울이 오면 여러분들을 찾아와 도와줄 동역자가 있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여러분들이 인생의 겨울에 있는 자들을 향해 다가가야 한다. 사람을 위한 사역을 해야 한다. 고통을 나누고 슬픔을 위로하는 동역자가 먼저 되어야 한다. 그때 혹 여러분에게 인생의 겨울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외롭지 않을 것이다. 춥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인생의 추운 겨울이 찾아와도 동역자들을 통하여 인생의 따뜻한 겨울이 되시길 축복한다.
둘째, 인생의 겨울이 올 때 축복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 22절이다.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바울은 이 편지의 마지막 고백을 축복의 언어로 마무리하고 있다.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원한다. 은혜가 너희와 함께하길 원한다. 진짜 아름다운 사람이 누구인가? 마지막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마지막이 아름다운 사람이 누구인가? 마지막에 쓰는 언어가 아름다운 사람이다.
우리는 종종 인생을 열심히 살아오셨고, 인내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아오셨다가 마지막에 은혜를 다 쏟아 버리는 분들을 본다. 질병으로 병상에 누워 있거나 노쇠하여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섭섭함이나 쌓여 왔던 불만들을 말하는 분들이 계신다. 며느리가 자신에게 잘 못 한 것, 아들이 효도하지 않은 것, 또는 가족들이 섭섭하게 한 것, 늘어놓으신다. 물론 몸과 마음이 지치니까 표현 할 수 있다. 그러나 보면 축복의 말이 머물지 않으면 은혜스럽지 못하다.
여러분 입술의 언어를 축복의 언어로 바꾸어 보아라. 마지막이 아름다워질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축복의 언어를 다 사용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는데, 비판, 정죄, 미움, 불평의 언어를 사용할 할 시간이 어디 있는가? 사랑하기도 부족한데, 언제 미워할 시간이 있겠는가? 축복의 언어가 우리 입술에 가득하길 축복한다.
우리도 언젠간 인생의 겨울을 맞이할 때가 있다. 그때 좋은 동역자들과 축복의 언어를 통해서 추위를 이기고 따뜻한 삶으로 넉넉히 이겨내시길 축복한다.
홍석균 목사(한성교회 청년부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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