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다짜고짜 말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잘 알듯이 세례요한의 공동체는 금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속세를 떠나 광야에 살았습니다.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수도사 생활을 했습니다. 금욕주의자들에 있어서 금식은 경건의 상징이었지요. 바리새인에게도 금식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지만 당시에는 존경받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들은 높은 율법의 기준을 따라 실천을 강조했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금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바리새인이 자신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한다고 자랑한 것을 보면 그들에게 금식은 대단히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걸 잘 아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왜 금식을 하지 않냐고 따졌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9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혼인집에서 신랑이 있을 때는 금식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잔칫집에서 누가 금식하는 사람이 있나요? 상황에 맞지 않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금식을 통해서 말씀하고자 했던 것이 혼인 잔치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관계를 종종 혼인 잔치에 비유합니다. 하나님은 구속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 신랑 되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 사건은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큰 기쁨의 사건이지요. 그러니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금식이 아닙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가 금식 할 때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언제입니까? 20절입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20절) 신랑이 빼앗길 날이 언제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를 말합니다. 그 때는 반드시 금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금식을 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가 무엇입니까? 옛것에 갇혀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와 바리새인의 제자는 옛 생각과 옛 방식에 매여 신랑 되신 예수님을 몰라봤습니다. 그래서 잔치에 참여하지 못했고, 기뻐하지도 못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옛 생각과 옛 방식에 메여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새로운 역사를 경험하지 못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옛 생각과 옛 방식에 매여 사람들을 비판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왜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왜 그 모양으로 사는 겁니까?” 마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비난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생각과 방식에 매여서 형식적으로 예배하고 있지 않습니까? 때로는 금식도 하고 기도 합니다. 선행을 베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오히려 내 자랑과 의가 되진 않았습니까?
옛 생각과 종교적 관습에 빠진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옛 생각과 옛 방식을 벗어버리고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생각하고 새롭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첫째는 생베 조각에 관한 비유였습니다. 생베조각은 새 옷감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해어진 옷을 고치려고 생베 조각을 가져다가 붙이려고 하지요. 그러나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새 옷감의 탄력이 헌 옷감을 잡아당겨서 결국 옷 전체가 찢어지기 때문이지요.
둘째는 새 포도에 관한 비유입니다. 당시는 오늘날처럼 포도주를 유리병에 담지 않고, 동물의 가죽으로 부대를 만들어서 담았습니다. 그런데 오래된 가죽 부대는 늘어날 때로 늘어나서 신축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래된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으면 점점 부풀어 올라 터져 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옛 생각과 옛 방식에 갇혀 살지 말라고! 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옛 생각과 방식에 집착하면 결국 찢어지고 터져 버리는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라브리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라브리 공동체는 프란시스 쉐퍼가 세운 공동체 곳입니다. 한번은 라브리 공동체가 더 큰 도약을 위해서 모두가 금식하자고 결정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 모든 멤버들은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음식이 사라진 것입니다. 누가 몰래 음식을 먹은 것이지요. 라브리 공동체는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누가 금식을 망쳤냐고? 당장 그 사람을 색출하라고? 의심과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약속한 금식은 반드시 지켜야 하고, 어긴 사람은 혼을 내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프란시스 쉐퍼가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생각과 방식을 보여주었습니다. 쉐퍼는 사람들 앞에서 빵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 누구보다 화를 낼 것으로 생각했던 프란시스 쉐퍼가 음식을 먹었던 것이지요. 그때 프란시스 쉐퍼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금식 때문에 서로 비난하고 정죄한다면 차라리 음식을 먹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그는 과거의 생각과 방식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용서와 포용이라는 새로운 생각과 방식을 택했던 것입니다. 결국 쉐퍼를 통해 라브리는 다시 평온을 되찾고 성장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내가 버려야 할 옛 생각, 옛 방식은 무엇인가요? 과거에 갇혀서 버리지 못하는 내 고집과 아집은 무엇인가요?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 인생이 찢기고, 터지게 됩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행동을 꿈꾸십시오. 오늘 이 새벽에 내게 주시는 새로운 생각과 뜻을 통해서 새롭게 결단하시는 시간이 되길 축복합니다.
홍석균 목사(한성교회 청년부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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