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21장 15~26절)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여장을 꾸려서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 거리는 약 104km이다. 이렇게 먼 거리를 한숨에 달려간 이유는 바울이 전해 주고자 했던 메시지가 분명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자 유대인들의 환영을 받게 된다. 그리고 난 뒤 야고보에게 그동안 사역을 보고한다. 야보고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다. 바울이 전한 내용은 자신이 이방인들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과 전한 복음이 이방인들 가운데 열매를 거두게 하셨다는 내용이었다.(15장 12~17절)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20절) (이 말씀을 통해) 유대인들 중에 믿는 자가 수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아 바울이 전한 복음은 당시 핫이슈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때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반응이었다. 당시 예수님의 동생 야보고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있었는데 바울이 전한 복음을 전적으로 신뢰했다는 것이다. 사실 야고보는 뿌리부터 유대인으로서 율법의 규례를 지키고 선민사상이 뼛속까지 배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절대로 바울이 데리고 온 이방인들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지 않았다. 이방인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이유로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는 종교적인 허례의식으로 고착화되지 않았다. 우리의 신앙에서도 고착화되지 않는 신앙이 중요하다.
예수를 믿는 것이 날이 가면 갈수록 신앙적인 능구렁이가 되는 경우가 많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신앙생활 하는 것이다. “다 아는데 뭐. 그거 다 해본 건데 뭐”. 그러나 신앙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 겸손해져야 한다. 늘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에 대해 포용성을 가져야 한다. 시류에 타협하거나 동화되라는 말이 아니다. 새로운 문화와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준비하라는 뜻이다. 오늘날 교회는 폐쇄성을 가지면 안 된다. 언제든지 새로운 자들이 교회의 문턱을 넘었을 때 넓은 마음으로 받아야 한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간 이유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야보고는 바울을 신뢰했지만,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오해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21절)
바울은 모세를 배반하라고 했고, 할례를 금지하고 관습을 파기 했다는 잘못된 소문이 퍼졌던 것이다. 그래서 마치 바울은 공개수배자가 된 상황이었다.(21~22절)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이런 일을 하라고 했단 말인가 그는 논란의 중심에 섰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누군가가 대한민국의 민족성을 부정하고 일제제국주의를 받아들이라고 했다고 한다면 대한민국 땅에서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마찬가지로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야고보는 바울에게 정결규례를 제안한다. 성경에 말하는 정결규례는 유대 문헌에 나실인에 대한 규정과 서원을 마칠 때 한다. 규례의 방식은 숫양 두 마리와 암양 한 마리, 소제물과 전제물이 필요한데(민 6장 14~15절) 상당한 큰 비용이다. 바울은 이때 정결규례의 네 사람의 비용을 내야 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이러한 큰 비용을 지출한다면 경건한 유대인으로 여길 것이라는 야보고의 제안이었다.
그때 바울은 그 제안을 따르기로 결정한다. 절대로 타협이 아니었다. 바울은 로마의 총독 베스도, 벨릭스 앞에서 당당하게 복음을 전했던 인물이다. 절대 진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그의 행동은 스스로 복음을 위해서 모든 사람의 종이 되겠다는 결단이었다. 그는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서 자신의 시간과 물질, 헌신을 아끼지 않았다. 바울은 타협한 것이 아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종이 되기를 결정했다. 타협과 용납 개념은 반드시 다르다. 바울의 이러한 행동은 복음을 위해서 몇 사람을 얻고자 하는 자였다.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 9장 22~23절) 우리가 뭐 아쉬울 것이 있어서 때로는 복음을 전할 때 낮아져야 하는가? 그 이유는 한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은 고착화되면 안 된다. 유연성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타협과 안주가 아닌 새 생명을 얻고자 하는 이유에서 비롯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사람의 몸으로 낮아지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낮아짐으로 우리에게 맡기신 영혼을 구하시길 축복한다.
홍석균 목사(한성교회 청년부디렉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