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세대에서 법은 정의를 구현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방편이다. 악한 자를 징벌하고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수단이다. 법이 그 목적을 잃고 약자를 외면한 사건이 있다. 1973년 미국 연방 대법원이 낙태를 합법화시킨 ‘로 대 웨이드(Roe v. Wade)판결’이다. 낙태를 원했던 22세 여성 노마 맥코비(Norma McCovey)가 로(Roe)라는 가명으로 지방검사 웨이드(Wade)를 상대하여 벌인 재판이었다. 로(Roe)는 강간에 의해 임신했다고 검사를 속였다. 낙태 옹호론자인 두 명의 여성 변호인의 도움으로 낙태 금지에 대해 위헌 소송을 했다. 연방대법원은 낙태 금지법이 수정헌법 14조의 여성의 ‘사생활의 권리를 침해 한다’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 판결로 인해 낙태를 금지하는 법률들은 폐지되었고, 당시 의술로는 살릴 수 없었던 24주의 태아까지 낙태시킬 수 있게 되었다. 지난 2021년 1월 미국 국가생명권위원회(National Right To Life Committee)는 48년간 미국에서 총 6천2백만 건이 넘는 낙태가 시행되었다고 밝혔다. 한편 2021년 3월 한동대 법전원의 굴드(Gould) 교수는 성산생명윤리연구소 포럼에서 미국의 27개주 전체 인구를 다 합쳐도 지금까지 낙태된 태아의 숫자에는 못 미친다고 주장하였다. 잘못 제정된 법이 무수한 생명을 죽게 하였다.
1973년 미국에서 낙태가 합법화되는 배경에는 산아제한운동(birth control movement)을 주도한 마가렛 생어(Margaret Sanger)의 역할이 크다. 20세기 초에 ‘산아제한’이라는 용어는 신을 거역하는 죄악으로 인식되어 입에 올리기도 조심스러운 말이었다. 이 용어를 보편화시킨 사람이 마가렛 생어다. 간호사로 일했던 여성 운동가 생어는 1916년 미국 최초의 피임 센터인 산아제한클리닉(birth control clinic)을 열었다. 이 기관은 이후 1942년에 미국 최대 피임 및 낙태기관인 가족계획협회(Planned Parenthood)로 발전했다. 협회는 피임약 개발에 매진하여 여러 소송을 이겨내고 1965년 사용 허가를 받아냈다. 이러한 산아제한 분위기 속에서 1973년 낙태 합법화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이 판결을 내린 판사 해리 블랙먼(Harry A. Blackmun)은 1996년 가족계획협회로부터 '마가렛 생어 상(Margaret Sanger Award)'을 수상했다. 낙태 합법화로 가족계획협회의 손을 들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가렛 생어의 산아제한 정책은 우생학에 바탕을 두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죄악은 부모로부터 질병을 물려받은 아이들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라며 그들은 실제로 인간이 될 기회가 없는 아이들이라고 주장했다. 공공연히 "더 이상의 아기는 안 된다(No more babies)"고 했다. 1930~1940년대에 우생학을 통해 유전병은 물론 범죄자, 정신박약자, 정신병 환자들을 강제 불임 시키는 사업에서 큰 역할을 했다. 1952년 생어는 활동을 국제무대로 넓혔다. 국제가족계획연맹(International Planned Parenthood Federation, IPPF)를 설립하고 초대 회장을 지냈다. 이 단체가 대한민국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당시 대한민국 형법은 낙태를 금지하고 있었다. 1953년 해방 이후 제정된 대한민국 최초의 형법은 생명을 존중하는 근대법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제가족계획연맹(IPPF)의 지원을 받아 1961년 대한가족계획협회가 발족되면서 낙태 금지법은 무색해졌다. 우생학에 바탕을 둔 IPPF의 가족계획은 개발도상국가에서 오직 산아제한에 집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시술비를 지원하기까지 하면서 ‘월경조절술’이라는 이름으로 낙태를 시행했다. 형법에 낙태죄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들은 쉽게 낙태를 할 수 있었다. 낙태죄가 거의 사문화(死文化) 되어 효력을 잃었고 낙태는 크게 성행했다. 1961년 33%남짓하던 낙태 경험률은 1985년 53%까지 치솟았다. 두 명의 여성 중 한 명 이상은 낙태를 했다. 국가의 잘못된 정책은 법을 무력화시키고 전 국민을 낙태에 대해 아무 죄책감 없이 만들었다. 1973년 정부는 모자보건법을 제정하며 낙태를 일부 합법화하기로 결정했다. 본인이나 배우자가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장애가 있는 경우,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강간이나 근친상간으로 임신한 경우, 모체의 건강이 심각하게 해함을 받을 경우에 한하여 낙태를 할 수 있게 하였다. 낙태의 허용사유는 국민들에게 낙태가 합법일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오랜 기간 국민들은 낙태가 인간생명의 훼손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지냈다. 잘못된 정책과 법이 국민의 눈을 가려 태아의 생명을 꺼뜨리는 일에 가담하게 한 것이다.
가족계획협회가 들어서고 60년이 지나는 동안 국민들에게는 많은 인식의 변화가 생겼다. 과학의 발전은 내시경을 통해 엄마 뱃속의 아기를 선명히 보여주며 생명의 실재를 알게 해주었다. 신생아학의 발전으로 22주의 초미숙아가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또한 시험관 아기 시술이 보편화되며 많은 국민들은 수정란이 곧 생명인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생명의 존재를 마주하며 이제는 더 이상 낙태가 월경조절이나 세포 조직을 제거하는 여성의 권리라고만 주장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또한 약 50년 전 제정된 모자보건법 낙태 허용사유도 현대 의학에서는 의미가 없어지고 있다. 의학적 낙태 허용 사유였던 정신장애나 신체장애는 치료의 대상일 뿐 더 이상 낙태의 대상이 아니다. 예를 들면 수많은 태아들이 구순구개열이나 심장기형이 있다는 이유로 낙태 당했었다. 산모에게 암이 발생하면 병기(stage)와 상관없이 낙태를 했었다. 그러나 현대의학은 대부분의 선천성 기형을 수술적으로 교정하고 있다. 어떤 심장 기형은 엄마 뱃속에 있는 동안 치료를 해낼 정도로 의학은 발전했다. 산모가 암에 걸려도 아주 제한적인 경우가 아니면 항암 치료를 하며 대부분 건강히 아기를 출산할 수 있다. 2014년 삼성병원의 보고에 따르면 암에 걸린 산모 77%가 성공적으로 치료를 받고 출산을 하였다.
2019년 4월 11일 낙태죄가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은 후 현재까지 아기의 생명을 지켜주는 법이 공백 상태에 놓여 있다. 정부가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제시했지만 생명을 지키기에는 물론 산모의 건강을 지키기에도 여러 가지가 미흡하다. 첫째, 먹는 낙태약을 허용하면서 사용 기준을 제시 하지 않았다. 2018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에 따르면 먹는 낙태약을 사용한 사람의 72%가 낙태에 실패하여 추가로 수술을 받았다. 임신 10주 이후에 복용하면 자궁파열 및 대량 출혈의 심각한 부작용이 생길 수 있는 약을 쉽게 허용하면 안 된다. 둘째, 16세 이상 미성년자에게 부모 동의가 없어도 낙태수술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19세 미만 청소년에게는 술과 담배도 사지 못하도록 보호하는데, 태아의 생명을 없애는 일을 부모 없이 결정하라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셋째, 사회·경제적 사유로 낙태를 원할 때는 ‘상담사실확인서’만 있으면 가능하게 하였다. 상담자 자격에 굳이 성범죄 전과자를 포함시킨 것도 문제이고(제7조의5) 상담 후 숙려기간을 고작 24시간만 주고 낙태할 수 있게 한 것도 부적절하다. 이런 법은 반드시 생명 경시 현상을 불러온다.
잘못된 법안 하나가 수천만 명의 아기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잘못된 정책으로 여성의 절반 이상이 낙태를 경험하는 일이 있었다. 정부는 단지 낙태를 몇 주째까지 허용 할 것인가의 문제에만 매몰되어 여성과 태아의 생명을 모두 잃게 하는 법을 제정하면 안 된다. 새롭게 개정되어야 할 법안은 낙태를 막는 법이어야 한다. 아기가 낙태되거나 유기되지 않도록 산모의 신상을 비밀로 보호하는 보호출산법을 제정해야 한다. 또한 아빠의 책임을 강화시켜 아기의 양육환경을 보호해야 한다. 일명 히트 앤 런(Hit and run) 방지법인 남성책임법을 제정해야 한다. 정부는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산모들에게 적극적 경제지원을 해야 한다. 어렵게 태어난 아기들이 버려지지 않도록 가정을 선물해 주는 입양 사업과 미혼모 가정을 지원하는 사업에 예산을 집중해야 한다. 무엇보다 청소년들이 어려운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생명을 존중하는 성(性)윤리교육을 받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의 집을 번성하게 하셨다(출1:21). 세상의 권력에 맞서 하나님의 뜻대로 생명을 지킨 자의 이름을 성경에 기록해 축복해 주셨다(출1:15, 십브라와 부아). 성도들이 생명을 지키는 일에 나서는 것은 단지 낙태 합법화 법안을 막고자 함이 아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 땅에 하나님의 은혜를 알려주려는 것이다. 낙태를 고민하며 두려움에 싸인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비춰주려는 것이다. 생명 운동을 통해 낙태를 경험한 성도들이 회개하여 용서받게 하시고, 다음세대를 번성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고자 함이다. 작은 생명, 작은 자를 귀히 여기는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찬란하게 비춰지길 간절히 기도한다.
문지호(의료윤리연구회 회장, 명이비인후과 원장)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문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