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팅 커피전문점에 가면 자체 개발한 블랜딩 원두를 맛볼 수 있다. 브라질 원두를 기본으로, 그 위에 신맛 계열의 에티오피아 원두, 쓴맛 계열의 콜롬비아와 케냐 원두 등을 적절히 섞은 블랜딩 원두다. 진하게 내린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을 넣은 아메리카노 한 모금 마시니, 형형색색의 맛이 무지개 빛깔처럼 펼쳐진다. 달달한 카라멜 향기도 난다. 첫 번째 쓴맛은 혀를 톡 쏘고, 이어 신맛이 입안 가득히 맴돈다. 각자 고유한 개성은 잃지 않으면서 조화를 이루는 이 블랜딩 원두는 커피 시음자에게 인생의 낭만을 선사한다.
요즘 페미니즘 논란이 거세다. 엄지와 검지를 오므리는 손가락 그림은 한 기업체 포스터에 사용돼 거센 비판을 받더니 불매 운동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군 가산점제, 여성 징병제 등의 논쟁으로도 비화되는 모양새다. 워마드 등 여초 싸이트에서 남자의 특정 부위를 비하하기 위해 사용된 그림이라는데, 이 논쟁에선 남녀가 서로를 조롱하고 깔보며 무시하는 논법이 횡행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주장이 상대방을 부정함으로써 논리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논법을 종종 목도한다. 이를 진영 논리라 부를 수도 있겠다.
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창한 공산주의 이념에도 비슷한 논법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엔 ‘부정’의 논리가 깔려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모든 사물이 대립의 투쟁으로 발전한다며 혁명과 변혁을 유발하는 힘을 A에 대한 부정으로 봤다. 부정함으로써 새로운 상태가 창출된다는 것이다. 특히 엥겔스는 이를 ‘부정의 부정’이라 불렀다. 노동자가 자본가를 혁파해야 평등의 세상이 온다는 주장도 여기서 발원한다. 이런 진영 논리는 자신이 옳고 상대방은 틀리다며 비난하고 정죄하기 십상이다.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지난해 11월 한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에서 “공산정권의 대량학살은 엉터리 삼단논법(syllogism) 하에서 자행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대전제는 공산주의가 (인류를 구원하는) 절대선이다. 소전제는 반대세력이 (공산주의에 저항하는) 절대 악이다. 그래서 결론이란 절대선(=공산주의)을 위해 절대악(=반대세력)은 제거돼야만 한다”고 했다. 그러나 “대전제 자체는 경험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유사(類似)한 종교적 믿음일 뿐이다. 공산정권이 사용한 대량학살의 삼단논법이란 결국 그릇된 믿음에서 당위를 도출하는 엉터리 논증이다. ‘계급학살(classicide)’의 합리화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송 교수에 따르면, 이런 공산주의는 20세기 소련, 중국, 북한, 쿠바 등지로 확산돼 약 1억 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산된다. 희생자 수치를 살펴보면, 중국 6500만, 소련 2000만, 캄보디아 200만, 아프리카 170만, 아프가니스탄 150만, 베트남 100만, 동구 100만, 남미 15만 명이다. 북한에서도 우리 동포 200만 명이 학살됐다.
이처럼 공산주의는 피착취자인 노동자를 절대 선으로, 착취자인 자본가를 절대 악으로 상정한다. ‘피해자-가해자 구도’에서 폭발되는 분노란 혁명을 위한 강력한 에너지로 작용한다. 반대로 무고한 희생의 단초를 낳기도 했다. 남성 혐오로 굴절된 페미니즘도 공산주의적 논리를 차용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가부장제에서 남성을 가해자, 여성을 피해자로 전락시킨다.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은 여성에게 타도대상이 되기 쉽다. 이러한 피해자-가해자 구도에 천착된 페미니즘이 남녀 간에 화합, 배려, 존중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아니면 성대결이 빚어낸 긴장, 분노, 혐오 등이 서려 있을까? 성대결을 조장하는 페미니즘은 결단코 사회를 성숙과 화합의 길로 이끌 수 없다.
곽혜원 박사(21세기교회와신학포럼 대표)는 이렇게 진단한다. ”우리 사회에서 전개되는 페미니즘 현상은 남혐, 여혐 등 양성 간 조롱으로 치달으며, 남녀 분리주의를 부추겼다”며 “극단적 페미니스트들은 한국 남성들을 향해 극단적 혐오를 표출하고 심지어 미러링(받은 대로 되돌려 주기) 등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문제는 남성 혐오를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것이다. 대결과 혐오를 부추기는 페미니즘을 지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남성과 여성을 분리해 극단적 혐오를 부추긴다면, 사회의 기본 틀인 연대 정신이 무너진다”며 북유럽 국가의 페미니즘 운동을 예로 들었다. 즉 “‘사회는 가족’이라는 사회통합 정신 속에서, 성차별 방지 등 진정한 양성 평등 사회를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에 대한 영감이 떠오른다. 두 진영이 서로 싸우고 부정하면서 자신의 존재 근거를 확보하려고 애쓰는 세계는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자와 여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주도록 창조하신 게 아닐까?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고, 여자는 남자를 존중하는 세계다. 위계 질서가 아닌 특징의 차이일 뿐이다. 내가 제거돼야 너가 존재하는 세계도 아니다. 나도 필요하고 너도 소중한 세계다. 독일 신학자 칼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이라는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자유를, 그 모든 것에는 사랑을"이라고 말한 바 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 안에서 각자의 기질적 차이를 온전히 용납 받고 지지받는 균형 잡힌 세계를 꿈꿔본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