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며

1) 코로나19의 복기, 필요한 이유

조덕영 박사
조덕영 박사

세포조차 갖추지 못한 바이러스를 포함한 모든 생물이 하나의 조상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은 유명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를 비롯한 세속과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반면, 기독교는 온 세상의 모든 구성 요소와 더불어 생물이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했다는 성경 계시를 따른다. 이 세속 과학과 기독교의 기원관이 접촉점과 융합이 가능한 부분이 어디까지 인지는 여전히 관련 학자들의 논제로 남아있다. 하지만 세속 과학이든 기독교의 창조 계시든 그 기본 입장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세속 과학과 성경적 기독교는 그 본질의 세계관과 전제 아래 충실하게 각자의 논리를 전개해왔다.

​그렇게 과학과 성경적 기원론은 그동안 적절한 균형과 때로는 역동적 긴장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이 긴장 관계의 균열이 불현 듯 찾아왔다. 바로 코로나19의 팬데믹은 이 관계의 적절한 긴장과 균형을 무참히 허물어버렸다. 과학과 방역을 내세운 정치와 행정과 의료 통제 앞에 교회는 별다른 도전이나 응전의 모습을 보이지 못한 채 수동의 모습을 보였을 뿐이다. 그런 와중에 교회는 마치 코로나19 확산의 주범이나 된 듯 일부 언론과 대중들의 질타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분명 억울한 부분이 있다. 교회 안에도 전문 의료인들이 다양하게 포진되어 있다. 관련 전문가들과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중심이 되어 신앙적 목소리를 낼 충분한 시간과 기회와 좀 더 주도적 대응 수단은 없었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아더 홈즈(Arther F. Holmes)는 초대 교회부터 기독교는 모든 진리가 하나님의 진리라 천명해 왔다고 했다. 세상도 또한 창조주 하나님의 세상이다. 따라서 그 창조적 지혜는 모든 진리의 근원이요 규범이기에 불변의 본질 속에 보편적인 것으로 세상에 바른 목소리를 내어야 하는 기독교적 당위성을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코로나19 앞에 그저 제도권 권력에 순종하고 무기력한 수동의 자세로 당황하는 태도만 보였을 뿐이다. 신학과 신학의 논문이 극소수 신학자들만이 참여하는 책상 학문이 되어가고 있는 서글픈 현실 속에서 코로나19는 신앙과 신학에도 무언가 과제를 주었다. 20세기 신학이 구속 신학의 시대였다면 포스트모던과 4차 산업혁명이라는 급진적 변화와 함께 시작된 21세기는 신학도 이제 창조와 구속이라는 두 날개로 날아야 한다는 복음의 과제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코로나19의 성경적 복기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2) 박쥐, 그 작은 실마리에서 팬데믹으로

어릴 적(1960년대) 필자가 살던 고향 민가에는 박쥐가 참 많았다. 아마 당시 한반도 대부분 지역의 익숙한 풍경이었을 것이다. 박쥐는 주로 목조 건물의 나무와 벽 사이의 공간 속에 살면서 사람들과 공존하고 있었다. 옆집 세무서장 관사의 낡은 벽 속을 하루가 멀다 하고 드나들던 박쥐들 풍경이 눈에 선하다.

우리 민족은 박쥐의 그 요상한 생김새(?) 때문일까 박쥐를 생포하여 시식하는 것을 필자는 본 적이 없다. 다만 당시 유사한 풍경이 있었다면 동네 개구쟁이 형들이 참새를 잡아, 구워 시식하던 장면이 잔상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포장마차에서 팔던 참새나 토끼고기 등을 “샤슬릭”처럼 꼬치에 끼워 불판에 지지던 소리와 냄새를 뚜렷이 기억한다. 물론 박쥐도 일부 보양식이나 약용(치료 또는 단백질 보충 등)으로 식용하는 사람들이 국민 정서상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보양음식에 관한한 우리 민족의 집착은 어느 민족 못지않다. 하지만 박쥐만큼은 경제 상황이 나아지고 생활환경도 바뀌고 언론의 비판 때문인지 주변에서 시식한다는 소문은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런데 우리 한민족과 달리 중국은 여전히 박쥐 식용의 풍습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언론 보도나 유튜브의 동영상을 보아도 그렇다. 또한 중국 대도시의 빌딩 숲 뒷골목을 들어서면 장면이 바뀌어 마치 과거 6·7십 년대 고향 풍경을 보는 듯했기에 하는 말이다. 보기도 낯선 이 포유류 식용이 결국 인류 대 참사를 가지고 왔다. 사스와 메르스나 이번 ‘우한 폐렴’(코로나19) 모두 박쥐 속 바이러스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코로나19의 시발지가 중국 우한의 시장터이든 아니면 우한 생물 연구소이든 박쥐와 관련된 것은 분명해졌다. 도대체 이 바이러스는 무엇이고 성경은 왜 이 박쥐를 먹지 말라 했을까?

​코로나19가 세상을 빠르게 변환시키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19” 상황에 대해 뒤늦게 감염병 최고 경고 등급인, 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 상태를 일컫는 팬데믹(pandemic)을 선언하였다. 팬데믹은 다른 대륙의 국가에까지 추가 감염이 발생한 상태로, 인류 역사상 팬데믹에 속한 질병은 14세기 중세 유럽을 초토화시킨 '흑사병(페스트)', 1918년 전 세계에서 500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스페인 독감', 1968년 100만 명이 사망한 '홍콩 독감' 등이 있다. 특히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WHO가 1948년 설립된 이래 지금까지 팬데믹을 선언한 경우는 1968년 홍콩독감과 2009년 신종플루, 2020년 코로나19 등 세 차례뿐이었다. 그리고 이 현재진행형인 팬데믹이 세상을 어떤 방향으로 몰고 갈지 누구도 명쾌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제 전문가들 뿐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이구동성으로 인류와 지구촌의 패러다임이 코로나19 전후로 완전히 새로워질 것이라 판단한다는 점이다. 이미 인류는 1964년 도쿄 올림픽 이후 일본이 36년 만에 야심차게 준비했던 인류 대제전인 하계올림픽이 연기되는 초유의 사태를 경험했다. 앞으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은 세계 곳곳에서 다 반사로 벌어지고 있다.

3) 그렇다면 기독교적 관점은

​기독교는 이 사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지구촌 생태계와 관련하여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모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세상과 그분의 말씀, 곧 창조신학이 그 중심이요 출발점이다. 우주는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이요 지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 인류가 생명을 영위하는 삶의 터전이요 이 지구촌에서 인류는 영원과 구원을 갈망하며 살고 있다. 즉 이 터전에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발을 딛고 산다. 그리고 기독교의 핵심이요 중심인 기독론과 종말론도 이 터전을 중심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에 매몰되어 살다가 천국도 결국 “새 하늘과 새 땅” 즉 처소라는 점을 교회가 간과하였다.

​이 창조 교리와 구속 교리의 신학적 관계를 고찰한 주요 학자로는 폰 라드(von Rad)가 있다. 그는 이 창조 교리를 구원론적 관점에서 구속 교리의 역동성을 드러내는 보조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았다. 그럴 경우 구속 교리 속에 창조 교리는 매몰되어 숨어버리고 만다. 자연 신학을 철저히 배제한 칼 바르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20 세기 창조 신학이 구속 신학의 상징적 두 거물에 가려 독자적 영역 확보에 실패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하지만 창조 모티프가 구원 모티프에 종속한다는 폰 라드의 견해에 반대하여 창조 신학을 강조한 신학자도 있었다. 슈미트(Hans Heinrich Schmid, 1937-2014)는 창조신학을 성경 신학의 중심 대상으로 묘사하여 모든 신학은 특별히 창조를 말하지 않더라도 창조신학이라 했다. 비록 슈미트의 견해가 성경적 창조신앙을 고대 근동의 창조 사상과 관련하여 접근하였음에도 성경 창조 신앙이 세속의 기원론과는 차원을 달리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신학의 출발점으로서의 창조의 중요성을 지적한 점에서는 옳았다.

​구속 신학은 체계상 교리의 확장성에 일정한 제한을 가진다. 반면 창조 신학은 분명 기독교 사상과 과학 발전과 더불어 확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인공지능(AI)이나 코로나바이러스와 같이 과학의 점진적 발달에 따라 성경이 과거 역사 속에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없었던 영역에서 창조 신학은 역설적으로 성경 속 창조 신앙을 바탕으로 무한한 확장성을 열어 놓게 된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과 신학이 소박한 교리의 껍질 속에만 안주하면 안 된다는 것을 4차 산업 혁명 시대의 디지털·사이버 세상과 바이러스와 같은 미시의 미생물 세계는 눈 뜨게 만들어주었다. 그렇다면 코로나19의 팬데믹 아래 신학과 성경적 세계관은 마냥 제도권 권력에 순종하고 무기력한 수동의 자세로 만족했어야만 했을까? 이 문제를 창조신학의 관점에서 복기해보려는 이유다. (계속)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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