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고린도후서 8장 1-15절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도들이 상처받고,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헌금 때문이다. 교회가 헌금을 강요하거나, 불투명하게 사용했다는 이유이다. 또는 교회가 헌금을 사람을 판단하는 비교수단으로 삼았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 오히려 헌금 무용론까지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인 모습은 헌금에 대한 원리를 제대로 정립되지 못해 빚어진 결과라 하겠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헌금의 원리”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먼저 바울은 헌금의 원리를 말하기에 앞서 마게도냐 교회의 모범을 언급하고 있다. 마게도냐 교회는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한 교회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마게도냐 교회가 풍성한 헌금을 했던 이유가 부유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게도냐 교회는 2절에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 극심한 가난 가운데 있었다. 본문의 배경은 AD 41-51년에 예루살렘 교회에 대기근 때에 일어난 일이다. 각국에 흩어진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헌금을 모았다. 마게도냐 교회도 이 헌금에 동참했는데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 가운데 한 것이다. 물론 마게도냐 교회가 당한 시련과 가난이 구체적으로 본문에서는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물리적인 위협과 박해를 당했던 상황이었다. 예컨대 오늘날 터키는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주민등록증에 종교를 명시한다고 한다. 겉으로는 자유를 보장하지만 이슬람 뿌리가 있는 국가라서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적으면 불이익을 주기 위해서이다. 기독교인이 되면 사회적인 진출도 가로막고 세금폭탄까지 때린다고 한다. 당시 마게도냐 교회도 이러한 시련으로 인해 극심한 가난에 처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풍성한 헌금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고린도 교회와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고린도는 최대의 상업도시였다. 당시 고린도의 자유인이 25만, 노예가 40만이었다는 것은 엄청난 부를 소유한 도시였음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는 예루살렘의 기근에 무관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시련과 가난가운데 마게도냐 교회가 어떻게 풍성한 헌금을 할 수 있었던 것인가? 첫째, 사랑의 원리를 따랐기 때문이다. 5절에 보면 마게도냐 교회는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다고 한다. 자신을 주님께 드린다는 것은 사랑에 근거할 때만 가능하다. 우리가 잘 알듯이 대다수의 부모님 세대는 평생을 자식을 위해서 살아오셨다. 먹고 싶은 것 안 먹고 입고 싶은 것 안 입고 자식들 공부시키기 위해 헌신해 오셨다. 그렇다고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면 끝이 나는 것이 아니었다. 자녀들의 취업이 기다리고 있다. 그럼 취업만 시키면 이제 손 좀 놓아야지 라고 생각하셨다. 그런데 막상 취업을 하게 되면 또 결혼이 남아 있다. 결혼만 하면 이제 손 뗄 수 있는가? 부모님은 부모로서 졸업하실 수 없다. 왜냐하면 손자 손녀까지 보셔야 하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자식을 끝까지 AS 해줘야 한다. 정작 자신은 AS도 못 받으면서 말이다. 어떻게 자식을 위해서 평생 헌신할 수 있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헌금도 마찬가지이다. 헌금은 강요가 아니라 사랑의 원리로 드리는 것이다.
누가복음 7장에 예수님께 향유 붓는 한 여인이 나온다. 그러자 바리새인이 비난했다. 그때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 어떤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 있는데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 또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갚을 능력이 없어서 둘 다 탕감해 주었다. 이때 그 둘 중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많이 탕감받은 자라고 말한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바리새인, 너희들은 나를 위해 발도 씻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인은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향유를 부었다. 이는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스스로 대접받기 위해서 하신 말씀인가? 그렇지 않다. 주께 많이 사랑받은 자가 주께 많이 표현한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바울도 본문의 8절에서 사랑의 진실함으로 표현하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헌금을 드리기 전 주의 사랑, 주의 선하심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늘보다 더 높으신 아버지의 사랑을 묵상해 보아라. 헌금은 시험거리가 아니라 감사거리다. 헌금은 부담이 아니라 기회이다. 건강 주신 것, 일할 수 있는 직장 주신 것, 호흡 주신 것,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교회 주신 것을 생각해 보라. 그때 기쁨으로 기꺼이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주께 드리는 헌금이 감사거리와 기회가 되길 축복한다.
둘째는 균등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다. 14절의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가진 자들의 재산을 몰수해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사회주의나 해방신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성도의 부족을 채워주는 공동체라는 뜻이다. 교회는 이해집단이 아니라 영적공동체이다. 그래서 돈은 빌려 달라고도 하지 말고 빌려주지도 말아야 한다. 차라리 힘들면 그냥 주는 일이 있더라도 금전거래를 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영적인 결속력이 깨어지기 때문이다. 성도의 관계가 채무 관계로 맺어지면 성도 간에 높낮이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있는 자가 과시해서는 안 된다. 낮아져서 베풀고 섬겨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성육신이 약한 우리를 강하게 하셨고, 가난한 우리를 부요케 하셨다. 눈먼 우리들을 눈 뜨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낮아지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너무 욕심부리지 말자. 물질의 성육신을 통해 공동체가 평균케 될 때 공동체는 건강해질 것이다. 이러한 사랑과 균등의 원리를 따라 드리므로 주님이 받으시고 사람을 살리는 예물이 되길 축복한다.
홍석균 목사(한성교회 청년부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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