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센터 북한구원 화요예배 2일 모임에서 탈북민 임사라 강사(민들레심리미술상담센터)가 간증을 했다.
임사라 강사는 고난행군 시기 북한의 현실을 전했다. 또한 강제북송 후 전거리 교화소에서 경험한 북한 통치자들의 야만적 악행과 함께 교화소에서 만난 한 선교사의 신앙을 증언했다. 이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에 온 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일상을 간증했다.
임 강사는 “함경북도 청진에서 1남 2녀 중 막내딸로 태어나 사랑받고 살다가 24살이 되던 1995년 작은 광산 마을로 시집을 갔다. 북한 땅 전역을 공포와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고난행군 시기가 시작되었고, 처참한 현실을 우리 가정도 피해 갈 수 없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고 살 때가 많았고, 1996년 생후 6개월 된 조카가 영양실조로 죽고, 그해 가을 친정아버지가 굶어서 돌아가셨다. 첫 돌을 쇤 아들은 불도 없는 캄캄한 방을 기어 다니다가 밥가마에 데어 화상을 입고 죽었다. 이렇게 사랑하는 가족을 땅에 묻고 가슴에 원을 안고 살아야 했지만 아플 새도 없이 생존을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해야만 했다”고 했다.
이어 “이후 두 아이를 낳았고, 고난행군이 10년이 지난 2004년에도 우리 가정은 여전히 극심한 생활난을 겪고 있었다. 그해 8월 앉아서 굶어 죽기보다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 오려고 5살짜리 딸과 3살 난 아들을 집에 두고 국경을 넘었다. 아이들이 눈에 밟혀 참 많이도 울었는데, 그 아이들이 벌써 23살, 20살이 되었다. 이따금 소식을 듣다가 지금은 감시가 심해서 2년 전부터 소식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는 “중국 천진에 있는 한국 회사에서 근무하던 중 2008년 조선족 아주머니의 전도로 조선족 교회에 가게 되었다. 하지만 북한의 우상교육으로 세뇌되었기에 처음엔 성경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찬송을 부를 때 북한에 두고 온 어린 자녀를 생각하며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 후로 기도로 북한에 있는 자녀와 가족들을 하나님께 맡기면서 주일마다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고 했다.
이어 “2009년 갑자기 회사로 들이닥친 중국 공안에 붙잡혀 강제북송을 당해 전거리 교화소에 가게 되었다. 구류장 안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견디기 힘들어 주님을 많이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제가 고통당할 때 저와 함께하셨고, 찬송을 부르게 하셨다. 그때 저를 위로해줬던 것은 중국에서 불렀던 찬송과 기도였다”고 했다. .
임 강사는 “북한 전거리 수용소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야만도살장이었고, 짐승보다 못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 곰팡이가 파랗게 핀 썩은 옥수숫가루에 두부콩 몇 알을 넣고, 돌과 모래가 3분의 1이 섞인 걸 쪄서 주면서 온종일 고된 노동을 시켰다. 밤이면 작은 방에 50~60명을 가두고, 여름이면 화장실 냄새가 코를 찌르는 방안에 갇혀 지내야만 했다. 감옥 안에서 씻는 건 상상도 못 했고, 작업장에 끌려 나갈땐 배고픔을 달래지 못해 길가에 떨어진 옥수수나 배춧잎 같은 걸 주워 먹었다”고 했다.
이어 “수용소의 일과는 일하다가 나무를 해서 오라면 산에 가서 나무를 주워야 했고, 산나물을 캐서 오라면 허기진 배를 끌어안고 나물을 뜯어 바쳐야만 했다. 낮에는 노동으로 밤에는 사상교육에 시달려 지친 몸에 허기진 배를 안고 잠자리에 누우면 이와 빈대, 바퀴벌레, 쥐까지도 우리를 괴롭혔다. 감옥 안엔 몸이 아파서 일을 못 하는 죄수도 있었다. 하지만 엄살을 부린다며 작업장에 억지로 끌고 나가 일을 시켰고, 아픈 몸을 비틀대면 일을 제대로 못 한다고 몽둥이로 때리고 발로 찼다”고 했다.
그는 “몸이 아파서 감방에 남게 된 어느날, 헌 누더기 담요를 뒤집어쓰고 부르르 떨고 있는 아픈 죄수를 보았다. 저는 그 움직임 속에서 분명 그가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만이 알고 느낄 수 있는 영적인 호흡이었다. 그때 이 감옥 안에도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랐지만, 그분의 신변이 노출될까봐 다가가지 못했다. 며칠이 지나 2011년 설날, 그분께 다가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조용히 인사했다. 그분은 중국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경공부를 하다가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강제북송 당한 선교사님이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반가워했고, 간단한 소통 후 두 손을 꼭 잡고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선교사님은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 우리 아버지가 마귀 사탄을 꼭 멸할 거라고,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면 우리 주님이 지켜주실 거라며 기도하자고 하셨다. 우리는 두 손을 꼭 잡고 ‘두려워 말라 강하고 담대하라 낙심하며 실망치 말라’는 복음성가의 후렴을 조용히 불렀다”고 했다.
이어 “선교사님은 5년의 징역형을 받았는데, 작업장에 갈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너무 허약했다. 그러나 교화소 관리들은 선교사님을 끌고 다니면서 줄을 잘 맞춰 걷지 못한다고 발로 차고 때렸다. 선교사님은 참혹한 아픔과 고통이 몰려올 때도 하나님을 부르고 기도하면서 신음 한 마디 내지 않고 견뎌냈다. 그뿐 아니라 전거리 교화소라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살벌한 환경 속에서도 복음을 전했다. 선교사님은 하나님을 전도했다는 이유로 고발당했고, 기독교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살아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는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 하지만 선교사님이 처참한 고문과 핍박 속에서도 목숨 바쳐 지켜낸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복음을 북한 당국자들은 결국 빼앗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자유를 누리며 기도하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 선교사님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오직 믿음으로 주님만 믿고 살아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자신의 삶으로 보여준 21세기 사도바울과 같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이렇게 북한 당국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예수를 믿는다고 갖은 박해를 가하고 있다”고 했다.
임 강사는 “주님의 은혜로 2년 형을 감형해 출소 후 2014년 9월 재탈북을 했다. 주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 속에서 제2의 인생을 살아가며 기적과도 같은 변화를 맛볼 수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매일 평안을 주시고 자유를 누리며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감사의 기도가 절로 나왔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 땅에 이렇게 잘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힘든 고비마다 저를 지켜준 수많은 하나님의 천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곳에서 갖게 된 꿈은 제 인생에 큰 전환점이었다. 사십 평생 오직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았던 제가 남한 땅에서 저만의 꿈을 갖게 되었고, 그 꿈을 향해 달리다 보니 오늘의 제가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북한에서 어렵고 힘들었던 경험들로 인해 제 앞에 맡겨진 일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북에 두고 온 자식들 생각에 밤잠을 제대로 못 자고 울 때가 많았다. 나만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누려도 되냐는 죄책감 때문에 제대로 평안을 누릴 수 없었다.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 나날이 깊어가던 어느 날 탈북민 치유캠프에 참가하게 되었다. 울고 있는 저를 주님께서 치유해주실 거라고 다독여 주신 목사님의 권유로 민들레심리미술상담소에 찾아가 심리미술 전문가 과정을 배우게 되었다. 나를 알아가고 변화를 경험하면서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할 힘이 생겼고, 저에게 오는 사람들에게 작은 쉼터가 되어주기도 했다. 그렇게 마음의 평안을 누리면서 고향 친구들에게도 이런 평안을 선물해주고, 그들의 아픈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고 주말에는 교회에 가면서 하루도 공백 없이 열심히 살았다. 2019년 1월 심리미술상담사 자격을 취득 후 활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임사라 강사는 “많은 탈북민이 마음 속 고통과 아픈 상처가 있다. 그들의 마음을 치유하지 않고서는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일할 수 없다. 내가 치유받았던 것처럼 이들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치유받아 복음 통일 되는 그날 북한 땅을 위해 복음 전사로 십자가의 군병으로 동역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를 원한다. 21세기 단 하나밖에 없는 분단국가에서 우상숭배하는 북한동포들의 아픔을 세상에 알리고, 그 땅에도 복음을 전하고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영원한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다. 이 생명의 복음을 북한의 가족과 동포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열심히 준비해서 복음 통일의 군사가 되겠다”며 간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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