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기독일보는 1970~80년대 한국 축구 대표팀의 주전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다 지금은 인도네시아에서 사역하고 있는 오석재 선교사님의 신앙과 삶을 4회에 걸쳐 나눕니다. 오 선교사님은 1978년 축구 인생의 절정에서 위기를 맞았고 어둠 가운데 하나님을 만난 후 복음 전파에 헌신했습니다. 1980년대 할렐루야 축구단에서 축구를 통한 선교 활동을 펼쳤고 1989년 은퇴와 함께 예장고신의 선교사로 인도네시아에 파송됐습니다. 이후 인도네시아, 뉴질랜드, 미국 등지에서 목회와 축구 선교를 병행했고, 현재는 인도네시아 유소년 축구팀을 양성하며 한국 축구와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살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뉴질랜드 헤밀턴 주사랑교회 한인 목회를 하다
이후 약 6년 동안 미국과 전 세계를 다니며 스포츠 프로그램을 통하여 사역하다가 개인적인 재정 문제 즉 선교비 조달이 해결되지 못해서 아쉽게 사임을 하고, 뉴저지 본 교단 모 한인교회에서 축구를 통한 사역을 함께 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미주 고신 선교사 신분인 동시에 교회 부목사로 사역하다가 우연한 기회로 말미암아 뉴질랜드 해밀턴 주사랑교회에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아 부임하게 됐다.
해밀턴 주사랑교회는 뉴질랜드 북섬 수도 오클랜드에서 자동차로 약 1시간 거리에 위치한 헤밀턴이라는 작은 도시인데 그 지역에서는 2번째로 큰 교회로 이민자, 유학생 등으로 구성된 교인으로 장년, 청년, 학생, 유년부 모두 합쳐서 약 100명이 넘어 모이는 교회였다.
주사랑교회에 부임 하기 전 까지만 해도 목회 경험이 전혀 없었고, 부목사 경험도 일년이 채 안 되는 사람이라 솔직히 걱정이 많이 됐다. 더욱이 이민 목회는 어디로 튈 줄 모르는 럭비공과 같다'는 교단 선배 목사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정말 조심스럽게 목회를 시작했다.
미국에서의 이민 목회 상황을 보면서 배운 것과 과거 교회 평신도와 집사, 권사로 재직 봉사하면서 나름대로 느꼈던 경험을 토대로 조심스럽게 목회를 시작하면서 먼저 목사의 지나친 권위주의 배격을 시작으로 교회 체질을 바꾸었다.
담임목사와 전도사의 사례비 차별을 최소화 하는 일, 교회 사역자인 전도사와의 수직 관계가 아닌 수평 관계 즉 동일한 동역자 관계로 대우 하는 일, 목사가 교인들에게 먼저 대접하는 일, 교회 문제에 대하여 권징을 올바르게 시행하는 것을 실천하는 것, 말씀 공부, 기도회, 주일성수, 선교하는 교회로 목회 방향을 잡고 목회를 함으로 교회는 안정적인 분위기로 운영이 됨으로 인하여 은혜롭게 목회를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민 목회의 현실 속에는 이민 목회 한계를 경험하며 많은 아쉬움이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영혼을 책임지는 목사에게 목회를 통한 기쁨과 즐거움도 주셨다.
한번은 목회를 시작 한지 약 3개월이 지나자 한 권사님이 저희 부부와 심방을 하였는데 권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처음에 운동선수 출신인 목사님이 교회 담임목사로 오신다는 소식에 개인적으로 매우 실망했고, 목회와 설교를 제대로나 할까 하고 많이 걱정을 했다고 하시면서 이제는 안심해도 될 것 같다고 하시는 말씀에 속으로 매우 당황한 적이 있다.
그 후 권사님이 저를 통하여 너무나 많이 변화되고 영적으로 성숙하게 자라고 부족한 목사를 신뢰하는 모습을 보면서 목회에 많은 위로와 힘이 되었다.
또 한번은 다른 권사님께서 갑자기 목 근육이 굳어 말을 못하고 병원가시기 전에 저희 집으로 방문하여 기도를 부탁 하셨는데 손을 얹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굳었던 목이 풀어지는 놀라운 치유가 되었다고 고백하시려고 다시 찾아 오셨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도 이 권사님은 저의 든든한 선교 개인 후원자로 협력하는 것을 볼 때 이것도 목회 사역에 큰 보람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교회에서 상처 받았다고 주일 출석을 거부하고 기분에 따라 마음에 안 들면 목사, 사모를 욕하는 별별 사람들을 다 상대해야 하는 현실에 속도 상하고 낙심도 되었지만 영혼을 사랑하신 주님의 심정을 헤아리며 기도하며 다가가기를 수도 없이 하며, 아내와 최선을 다해 성도들을 돌아보았던 그때 그날들이 가끔씩 떠오르곤 한다
헤밀턴 주사랑교회에서 목회한지 3년이 지나자 이민교회의 한계성을 느끼다 보니 다시 선교지에 대한 부담감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목회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에 선교사로 헌신 했을 때 선교지에서 선교사로 생을 마감한다고 했던 하나님 앞에 약속이 계속 부담감으로 다가와 나의 마음을 힘들게 하였다.
그렇게 지내던 중에 인도네시아 계시던 선교사님으로부터 수라바야에 있는 한인교회에서 글로벌한 목회자를 찾는데 우리를 생각 했다며 연락이 왔다. 교회가 목회도 선교사역도 함께 하도록 적극 지원 한다는 약속 해서 주사랑교회 교인들의 만류와 노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임을 하고 인도네시아로 들어가게 됐다. 약 10개월 만에 선교와 목회를 겸임하게 되었지만 교회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다시 교회를 사임하고 선교에 올인하기 위해 40일 금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으로 인도네시아에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저는 선교를 위하여 세상의 명예도, 물질도, 가족도 포기하고 지금까지 이 선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정말로 저는 지금 이 순간이 참 행복합니다." 라고 고백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나 같은 인간이 무엇이길래 남들이 할 수 없고, 가질 수 없고, 해 볼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도록 해주셨나! 하는 세가지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축구선수로 명성을 얻게 하시고 ,한국 최초 1호 스포츠 선교사로 파송받아 사역하게 하시고, 마지막 목사로 목회도 경험 할 수 있도록 하셨다. 그래서 저는 늘 고백하는 말은 "내 인생의 최고의 코치는 예수님이다."라고 고백 할 수 있다. 할렐루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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