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화요일 오전 10시에 진행되는 ‘탈북민센터 북한구원 화요예배’ 19일 모임에선, 탈북민 임혜진 목사(평양예루살렘교회)가 간증했다.
임혜진 목사는 “정치범수용소에서 17년을 살았다. 정치범수용소가 어떤 곳이고, 어떤 인권유린행위가 일어나는지 말씀드리겠다. 1970년대 초 북한에선 이주구역이라고 부르는 정치범수용소 관리소가 형성되었다. 이주구역에서 학교에 다녔는데, 주변에 머리를 빡빡 깎은 사람들이 돌도 나르고 일하는 것을 봤다. 그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것밖에 몰랐다. 어릴 때부터 봐왔기에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죄인인줄 알았다”고 했다.
임 목사는 “정치범수용소는 일반 감옥생활과 다르다. 다섯 개의 리를 합친 구역에 2만여 명의 정치범 죄인들이 있었다. 아침 5시 반에 나가서 저녁 9시 반까지 일을 해야 했다. 죄를 지었기에 하늘의 해를 볼 수도 없었다. 풀도 하나하나 손으로 뽑아서 걷어내야 한다. 사람처럼 호미질도 못 하고 모든 것을 짐승처럼 해야 했다”고 했다.
이어 “정치범수용소에 처음엔 가족이 다 같이 잡혀와도 2년이 지나면 남성들은 탄광 같은 제일 힘든 곳으로 보내진다. 그 정도로 북한은 관리소 안에 있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다스린다. 관리소 직원들도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인간이 일할 수 있는 곳이 아닌 곳으로 보내진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인간으로서 말할 수 없는 학대를 받았지만 북한에선 인권이란 말도 몰랐기에 응당 당연한 줄 알았다”고 했다.
임 목사는 “1985년 즈음에 관리소 안에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관리소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한 가족이 중국으로 도망쳤다. 남자 둘, 여자 다섯, 할머니, 애들까지 12명이 도망쳤다가 잡혀 왔다. 1만 5천 명의 관리소 사람들 앞에서 남자는 교수형에 처하고, 여자들은 총살했다. 일반적으로 총살할 때 9발을 쏘는데, 정치범수용소는 18발을 쐈다. 그리고 너희도 도망치면 이렇게 된다는 경고의 의미로 돌아가면서 죄인의 시체를 보게 했다”고 했다
이어 “충성심을 발휘한다고 시체에 돌을 던지고 몽둥이로 때리는 잔혹한 장면이 있었다. 그때가 20대 초반이었는데 열흘 동안 밥을 못 먹고 악몽을 꾸며 북한에 대한 위화감이 들었다. ‘왜 사람을 죽였으면 끝이지, 보는 앞에서 때리기까지 할까?’ 의문이 들었지만 죄인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고 넘어갔다”고 했다.
임 목사는 “아버지의 권력으로 북한 땅에서 대우를 받던 삶이 90년대 중반 시작된 고난의 행군으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병으로 아프게 되면서 제가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달리기 장사를 시작했다. 98년에 장사 물품을 가지고 중국에 가게 되었다. 중국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유혹에 넘어가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대한민국까지 오게 된 기막힌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했다.
이어 “1998년 5월에 두만강을 넘어갔다가 북한의 최고인민위원회 선거에 참여하지 못했다. 선거에 참여 못하면 정치적 불이익을 당하게 되는데, 그것이 겁이 나서 돌아오지 못했다. 2000년 4월, 중국에서 북송되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고통을 당했다. 북한에선 정치범수용소 보위부라는 직책을 가졌기에 대우를 받았는데, 중국에 먹을 것을 구하러 갔다가 오니까 그때부터 반역자가 되었다. 잡혀서 나가는 순간부터 머리를 쳐들지 말라고 했다. 보위부에서 취조를 받고 8월에 청진 집결소로 가게 되었다. 그때 겪었던 충격적인 사건 때문에 북한에 배신감을 느끼고, 살아서는 이 땅에 있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그는 “보위부에선 몸 검사를 여자들이 했는데, 집결소에선 23살의 남자 교도관 앞에서 옷을 벗기고, 부끄러워하니까 반역자들이 무슨 부끄러움이 있냐며 때리고 펌프 고문을 시켰다. 10평도 안 되는 방 안에 35명이 갇혀 있었는데 22살짜리 임신부가 있었다. 북한에선 유산시키기 위해서 통나무를 쥐고 뛰게 하는데 유산이 안되고 막달을 채운 것이다. 애를 낳는 순간 비닐 보자기 속에 싸서 처넣는 걸 보며 사람 목숨이 파리목숨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젖 한 모금 못 먹은 애가 사흘을 우는데, 저도 다섯 살 난 아이를 하늘로 보내고 중국을 갔다 왔기에 아기 울음소리에 가슴을 쳤다”고 했다.
이어 “아기만 두고 아기 엄마는 사흘 만에 나가게 되었다. 왜 애는 같이 안 보냈을까 의문을 가졌는데 방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아주머니가 불려 나갔다. 울면서 들어오는 아주머니의 손엔 물이 담긴 양동이가 있었다. 보자기에 싸인 아기를 풀면서 ‘내가 모든 죄를 다 가지고 가겠다. 선택권이 없다. 안 하면 맞아 죽는다’라며 아기를 거꾸로 들어 물 양동이에 집어넣었다. 아기가 1분도 안 되어 숨이 넘어가는 걸 눈앞에서 보면서 땅을 치며 울었다. 그때부터 절대 이 나라에선 못 산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임 목사는 “두 번째 북한에서 도망칠 땐 아무 집으로 뛰어 들어가 중국 돈을 주면서 도와달라고 했다. 만약 돈을 받고도 고발하면 잡혀가는데, 그분들이 내준 김치움 안에서 2박 3일을 숨어 있다가 두만강을 넘게 되었다. 중국에 있을 때 하나님이 있다는 걸 들었는데, 하늘의 신이 있다면 도와달라고 빌었다. 이 상황을 무사히 벗어날 수 있다면 신이 있다는 것을 믿겠다고 막연하게 빌었다. 이후 대한민국에 오기까지 국경을 넘으며 힘든 고비가 있을 때마다 간절하게 빌었다”고 했다.
이어 “대한민국에 와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처음엔 하나님의 손을 따라 대한민국에 오면 교회를 열심히 가겠다고 했지만 세상에 나와보니 정말 살기 좋았다. 낮은 낮대로 밤은 밤대로 세상의 화려한 불빛이 좋았다. 일하던 식당의 사모님이 권사님이었는데, 전도를 데려간다는 말에 놀러 가는 줄 알고 교회에 따라갔다. 6개월 정도 식당일을 하면서 교회에 다니다가 나가지 않았다. 교회에 안 나가니까 교회에서 찾아오는데 그때부터 교회에 대한 반감이 들었다. 북한에서 강제로 하던 생활총화를 하는 기분이 들어서 안 다니겠다고 했다. 그분들의 말씀이 귀에 하나도 안 들어오고 세상을 즐기며 인생을 내 멋대로 살기 시작했다. 세상의 현란한 빛을 따라다녔는데, 하나님께서 세상이 얼마나 좋은가 느껴보고 네 발로 오라고 가만히 내버려 두신 것 같다”고 했다.
이어 “하나님을 배척하며 살다가 2012년 장 파열이라는 대형사고를 당했다. 4~5시간이면 된다는 수술이 10시간 넘게 걸렸고, 중환자실에서 사흘 만에 깨어났다. 20일이 지나 관을 빼고, 물 한 숟가락을 2시간에 걸쳐 마셨는데, 한 방울도 넘기지 못하고 다 토했다. 너무 아파서 잠이 오지 않아 병원 바닥을 헤매며 다니다가 새벽에 휠체어를 탄 어르신들이 예배실에 가서 새벽기도를 한다는 말에 따라갔다. 너무 아파서 나도 모르게 이 아픔이 없게 해 주시면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기도했다. 돈을 벌고 살 때는 세상을 내 눈 아래로 보고 살았는데, 너무 힘드니까 하나님이라는 옷자락을 잡게 된 것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왔을 때는 할 일이 많다고, 하나님이 계시면 살려달라고 그게 기도인 줄도 모르고 간절하니까 소리가 나갔다”고 했다.
이어 “3개월 간 병원에 있다가 나와서 신학공부를 하게 되었다. 목회자가 되는 건 상상도 못 하고 선교사가 되면 외국에 간다고 해서 신학공부를 시작했다. 한 1년 정도 지나니까 몸이 괜찮아지면서 하나님 앞에서 꾀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2014년에 또 한 번의 교통사고가 나면서 다리부터 시작해서 갈비뼈 13대가 나갔다. 숨을 못 쉬니까 누워서 하늘만 쳐다보면서 하나님을 불렀다. 하나님께 내가 정말 경솔하고 잘못했다고, 이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으면 이제부터 하나님의 종으로 살겠다는 기도가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의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했다.
임 목사는 “2018년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하나님께 저는 해외에 가려고 선교사를 하려고 한 거지 목사를 하려고 신학을 한 게 아니라고 기도했다. 하나님께선 외국에 가서 무엇을 하려고 하냐고 반문하셨다. 해외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겠다고 하니 네 영혼들도 구원못하면서 어디를 나가냐고, 네 주변을 돌아보라는 마음을 주셨다. 그럼 먼저 센터를 설립해서 주변의 탈북민을 도와주자는 마음으로 센터를 쉼터처럼 시작했다. 센터 이름을 지을 때도 기도를 많이 했다. 어떤 이름을 지어야 북한을 알리면서도 탈북민의 영혼을 구하는 쉼터라는 게 알려질까 기도했다 기도 속에 평양대부흥, 평양의 예루살렘의 성전이 생각나는 말씀을 주셨다”며 “평양예루살렘 선교센터, 평양예루살렘교회라는 이름 자체로 하나님이 저에게 사명과 소명을 주셨기 때문에 감사하다 ”고 했다.
임 목사는 “탈북민 전도는 조급한 마음을 가지지 말라고 말씀드린다. 왔다가도 가고 갔다가도 오는 게 탈북민들의 믿음이다. 우리 교회도 3년이란 시간이 지나서 이제 헌금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2년 동안 헌금함을 돌리지도 않았다. 탈북민은 아직 정착하느라 힘든 것도 있고, 마음에 와닿아서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탈북민은 어릴 때부터 주체사상 교육에 세뇌되었기에 강제적인 걸 싫어한다”며 “탈북민 목회는 기다림이고 포용력”이라고 했다.
이어 “목회자들이 탈북민들은 많이 도와줘도 소용없다고 하신다. 그럼 저는 ‘몇 번 도와주셨냐?’고 묻는다. ‘3번 도와줬다’고 하면 ‘30년을 기다리라’고 말씀드린다. 3년을 기다려 작은 교회 안에서 탈북민이 감사헌금을 조금이라도 한다는 것에 정말 감사했다. 감사헌금을 받은 날 하나님 앞에 펑펑 울면서 저희에게 이런 마음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했다. 저희가 항상 받을 줄만 알지 감사에 보답할 줄 몰랐다. 하고 싶지 않아서 안 한 게 아니다. 북한에서 어릴 때부터 주어진 조건 안에서 배급을 받으며 살았다. 그래서 감사함을 받으면 받은 만큼 은혜를 베풀 줄 알아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이어 “대한민국에 정착한 3만 7천여 명의 탈북민은 하나님께 뜻이 있어서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이다. 대한민국에 정착해서 신학공부를 하는 탈북민이 300여 명 된다. 대한민국 교회가 북한 땅에 큰 성전을 세우겠다고 한다. 북한 정치, 북한 땅을 알아야 성전을 세우고, 북한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가야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먼저 대한민국에 보내주신 복음의 전사들을 무시하지 말고 기다릴 때 반드시 하나님의 마음이 이들의 마음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는 북한에 나와 똑같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땅을 세우려고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전도사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조급함을 가지지 말고 기다리면 하나님의 마음이 그 사람들 속에 전해지리라 믿는다”고 했다.
이어 “외로워서 교회를 찾아갔는데, 교회는 새 신자 등록에만 급급하고 성경 공부시키는 데만 급급했다. 그들의 마음에 들어가 보려고는 하지 않았다. 우리 교회는 예배가 끝나면 밥을 먹고 교류의 시간을 가진다. 앉아서 중국, 북한에서부터의 자기 마음을 터놓기 시작한다. 그들에겐 마음을 보듬어줄 수 있는 위로의 장소가 필요했던 것”이라고 했다.
그는 “교회에서 성경 말씀을 무조건 외우라고 하면 북한에서 시켰던 ‘도록’ 암기가 생각난다. 그래서 성경 봉독을 할 때도 성경 말씀을 잘 읽으면 북한 발음이 잘 고쳐질 것 같다며 성경을 읽게 했다. 그렇게 본인이 좋아서 다가가게 해야 한다. 북한에서 강압적으로 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에 자유를 찾아왔는데 교회에서 날 통제하냐는 마음을 갖게 된다. 대한민국 교회와 목회자분들이 탈북민의 이 마음을 조금 헤아려주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하나님의 마음을 갖는 탈북민이 될 수 있을 거로 생각한다”고 했다.
임 목사는 “북한에서 대한민국에 올 때까지 40년 동안 죄 많던 저도 하나님께서 다듬어주셔서 주의 종으로 써 주시는데, 하나님 품 안에 들어오면 변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10년이든 20년이든 인내심을 가지고 탈북민들을 조금 더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봐주시면 좋겠다. 주님께서 통일 복음의 용사로 보내주셨다. 복음으로 저 북한 땅을 통일시키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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