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승천 이후 재림을 기다리며 소위 ‘말세’를 사는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 디모데 후서는 구체적 예를 들며 이야기한다(딤후 3:5). 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할 인간의 창조질서가 무너져서 자신과 물질을 사랑하는 모습 뿐 보이고,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가정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 이 모든 것은 보이는 질서의 무너짐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뿐 아니라 성경은 말세에 심리 내적인 불안을 경험하는 인간의 모습을 나열한다. 무정하며 원통해하며 조급하며 자만해 지는 것이다. 본문을 보면, 현재 우리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본다. 특히 4절의 ‘조급함’을 보면 늘 분주하고 바쁜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빨리빨리’ 바쁘게 움직이는 우리에게 조급함은 늘 양가적인 모습을 지닌다. 이 ‘빨리빨리’라는 한국인의 특성에 대한 비판의 소리도 있어왔지만 이러한 특징이 국가의 발전에 기여한 부분도 있다고 한다. 만약 이 조급함이 건강한 부지런함이라고 한다면 긍정적인 부분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런데 성경은 이 조급함이 말세의 징조라고 한다. 이 때의 조급함이란 서두르고 허둥대며 중심 없이 사는 모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사람은 언제, 왜 이렇듯 조급하게 될까? 느긋하게 자신과 삶을 바라보며, 점검하며, 음미하며 단단하게 살 수는 없는 것일까? 대상관계학자인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 1882-1960)은 인간에게는 자신의 부족한 결점,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공격성을 발견하게 될 때 이를 빨리 복구시키고 싶은 일종의 ‘회복충동’이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문제를 발견하고 빨리 이겨내면서 – 사실은 이겨냈다고 착각하면서 – 완전히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일종의 승리감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공격하고 시기했던 대상이 사실은 바로 나에게 사랑을 주고 양육했던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러한 자신의 문제 있는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기 힘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빨리 잊고 화해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이론은 젖먹이 아이가 자신을 양육하는 어머니 존재를 향해 느낀 경험에서 시작되어 확장되었지만, 이러한 심리적 역동은 단지 영, 유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낯설지 않다. 우리 중 누가 나 자신이 시기심에 사로 잡혀 있음을 발견하게 될 때, 내가 그토록 미워하고 공격했던 대상이 나를 돌봐주고 사랑해주었던 대상이었음을 발견할 때, 그 괴로움에 오래 머물고 싶단 말인가? 우리는 빨리 화해하고 잊어버리고 새로운 시작을 하려고 허둥대며 노력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조급하게 회복하려는 시도는 마치 모래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그 죄책과 감사는 금방 사라지고 다시 미움과 시기심을 반복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반복되는 자책과 시기심을 반복하면서 결국 스스로에게도 지치게 된다는 것 말이다. 마치 모래위에 성급하게 지은 집이 비가 나고 바람이 불 때 무너지듯 말이다.
인간의 마음이 반석위에 집을 짓는 다는 것은 자신의 자책과 수치, 결점과 당황스러움에 좀 더 머무르는 것이다. 쉽게 판단하고, 쉽게 미워하고, 쉽게 시기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때 또 다시 쉽게 회개하고 쉽게 사과하고 잊으려 하기보다 그 당황스러움과 부끄러움에 좀 더 머무는 것이다. 빨리 극복하려 하기보다, 좀 더 자신의 실존에 머무르고 비참한 영적 현실을 들여다보며 어디서부터 부실하게 내 마음의 집이 지어져왔는지를 점검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자신의 죄성과 심리적 미숙함을 직면해야 하는 고통이 있지만 이 머무름과 지속의 시간, 죄책과 부끄러움과 소망과 과절이 어우러지는 이 애매모호한 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다시 부정적인 마음과 회복하고 싶은 조급함, 또 이어지는 자괴감의 조급한 무한반복적인 불안이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복음서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신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4).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제자는 예수님 안에 머물러야 함을 가르치신다. 머무른다는 것은 잠시 들르는 것이 아니다. 잠시 호기심에 들렀다가 아닌 것 같으면 쉽게 떠나가는 관계가 아니라, 그 안에서 시간을 갖고, 인내하며, 버티며 열매를 맺을 때까지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 조급하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단단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의심과 회의, 불안과 죄책의 시간에의 머무름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예수님 안에 버티며 남아있는 그들 안에 같이 버티며 남아주시겠다고 약속 하신다. 우리가 자기 절망과 죄와 부끄러움으로부터 금방 벗어나려고 조급해하지 않고 보다 깊이 자신의 현존에 머무른다면, 주님도 그 부끄러움의 자리에 함께 해주시고 단단한 회복과 성장을 이루어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인 것이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관계에서 무엇인가 어그러지고 불편해지고 오해와 갈등이 생길 때 우리는 흔히 쉽게 넘어가려고 한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성급하게 화해하고 잊으려한다. 마음에 담아두지 말자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권한다. 사과를 하고 용서를 강요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급한 화해의 제스처는 결국은 인간관계에서도 겉모양은 화해한 듯 보여도 마음으로는 깊은 균열을 가져오게 된다. 이것은 내 안의 진정한 내 모습과 보이는 모습과의 관계에서도 비슷하다. 나의 진정한 감정에 깊이 머무르지 못하고 성급하게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려고 하거나 스스로 회개했다고 위로하면서 직면하지 않을 때 내 스스로도 나 자신과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애매모호함에 보다 머무를 필요가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관계에서, 내 안의 깊은 나와의 관계에서 모순되고 공격적이며 불안한 나 자신이 발견될 때 너무 쉽게 회복하려고 하지 말자. 너무 쉽게 회개하며 용서받았다고 위로하지 말자. 성급하게 사과하면서 진정한 감정으로부터 도피하지 말자.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너무 쉽게 외면하지 말자. 너무 조급하면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조금 힘들더라도 더 천천히 꼼꼼히 들여다보며 가자. 간과했던 하나님과, 사람들과 내 자신과의 관계를 살피면서 말이다.
2000년 전 우리 구주 예수님은 이 땅에 신생아 아기로 오셨다. 이 예수님은 너무 작아서 궁전에 있는, 성전에 있는 큰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겸손한 동방박사, 한 밤중에 자기 일에 묵묵했던 목자들, 일생 메시야를 기대하며 기도하며 기다렸던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에게만 보였다. 허둥대지 않고 진중하게 진리를 찾고 기다리던 이들에게 예수님은 오신 것이다.
2020년 성탄이 다가오고 있다. 예수님은 올해도 탄생하려고 하시는데 올해의 예수님은 더 작아 보이는 건 아닌지 우리 마음을 점검하자. 팬데믹의 고통과 백신과 치료제에 대한 다양한 소식들로 조급하느라 행여 이 예수님이 더 작아지시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내 마음에 탄생하실 예수님을 위한 작은 방 하나 만드는 것, 조급하지 않고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의 자세일 것이다.
이경애 박사(이화여자대학교 박사(Ph.D), 이화여대 외래교수, 예은심리상담교육원장, 한국기독교대학신학대학원협의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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