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과 에스더 그리고 다리오와 고레스
마대 후손 다리오와 다니엘 그리고 페르시아 속의 모르드개와 에스더
다리오와 고레스의 여호와 하나님
다리오와 고레스 그리고 이란의 미래는?
법과 정치의 종교 기독교
기독교처럼 법과 정치에 민감한 종교가 있을까? 창조주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 하시고 방치하지 않으셨다.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친히 언약의 법을 제정하셨고 성경 2930명의 실명 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내 친구”라 칭한 아브라함과도 언약을 맺으셨다. 짐승을 반으로 쪼개어 타는 횃불이 그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가도록 했으니 언약을 어기면 그 심각한 죄악의 결과에 대해 경고하는 의미였다. 아브라함은 대단히 정치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조카를 구하기 위해 318인의 사병을 이끌고 문헌에 기록된 세계 최초 중동대전(大戰)의 후반에 참전하여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부녀와 인민을 모두 되찾아왔다(창 14장).
성경은 일관 되게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리라고 계시하고 있다(암 5:24). 기독교가 법과 정치의 종교인 이유다. 우리나라에도 신·구교를 막론하고 기독 정치인들이 많다. 가톨릭 신자 문 대통령이 “기회는 균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취임사부터 늘 노래를 부른 것도 결국 성경에서 나온 원리였다. 이렇게 하나님은 “공평과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 의로운 기독 정치인들을 찾고 계신다.
비록 불가지론자처럼 살았으나 경건한 개신교 가정에서 자란 칸트가 신을 부정할 수 없었던 것도 바로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한 신비한 도덕률 때문이었다. “내 행위가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는 방식으로만 행동하라”는 이 정언명령(定言命令, Categorical Imperative)도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결국 신앙 없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불변의 토대”(constant ground)를 찾기 위한 천재 철학자의 지난(至難)한 여로였던 셈이다.
하나님께서 언어와 법을 주셨듯이 대홍수 이후에도 인류는 이 도덕률이라는 일반 계시와 은총을 바탕으로 인간 사회의 법을 만들어왔다. 그 형태는 크게 3 가지로 분기되었다. 즉 신 중심(Theocentric), 인간 중심(Anthropocentric), 무신론 중심(Atheism centric)이 그것이다. 완벽한 법이란 있을 수 없다. 그 가운데 "신 중심" 법을 구현하려고 그나마 애쓴 국가들이 있다면 주로 중북부 유럽의 복지 구현 개신교 국가들이었다. 그 기본은 성경의 약자 보호 정신과 공평과 정의와 견제와 균형 정신에서 나왔다. 인간 중심 법을 구현한 국가들은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신학을 바탕으로 한 구교 중심의 유럽 중남부 국가들이었다. 관광업이 발달하고 대부분 포퓰리즘 정책으로 국가 부도를 겪은 나라들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는 1인당 GDP에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2011년까지 대한민국에 추월당한 적이 없는 국가였다. 재벌 오나시스가 놀랍게도 전 미 대통령 케네디의 부인 재클린과 재혼을 할 정도였으니 1980년대 이미 그리스는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던 국가였다. 그런 그리스를 제 2도시 데살로니키로부터 수도 아테네까지 열차로 가다보면 주변에 변변한 기업공장들이나 신축건물이 눈에 띠지 않고 자동차들은 대부분 중고자동차인 것을 목격하게 된다. 서울과 평택 사이만 해도 주변에 수많은 공장과 연구소들이 들어선 우리 대한민국과 정말 대조된다. 포퓰리스트 마르크스 실용주의자가 80년대 총리가 된 이후 그리스의 영광은 무너져 내렸다. 무신론 중심의 법을 구현한 나라들은 말 할 것도 없다. 마르크스주의 무신론 국가들의 와해는 1990년대 목격한 그대로다.
하나님 없는 인간의 법
하나님 없는 인간은, 인간이 가진 이기심과 탐욕 그리고 쾌락과 일반 은총 수준의 종교심 사이에서 무형의 도덕법칙을 기반으로 법을 세우려 한다. 그런 가운데 위법을 정의라 포장도 하고 억지도 부린다. 내로남불도, 아전인수도 서슴지 않고 때론 억압과 폭력과 심지어 적반하장까지 밀어붙인다.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성어도 바로 그런 악한 인간성을 반영한다. 바로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죄성 때문이다. 돌물은 위선이나 사악하거나 하나님을 조롱하지는 않으니 성경이 말하듯 인간은 때로 짐승만도 못한 존재인 것이다.
최근 각국은 일종의 “마초”형(?) 지도자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법에 대한 이 같은 국민들의 피곤함과 우울증을 증폭 시키고 있는 것을 보면 성경 말씀대로 죄 없다 할 수 없는, 결국 인간은 정의로 포장된 죄악 된 존재임을 보여준다. 러셀처럼 신앙에 부정적이었던 볼테르가 역사는 범죄와 재난의 기록에 불과하며 모든 역사는 거짓말이라고 냉소적으로 평가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역사는 늘 수레바퀴처럼 회전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투키디데스의 말이다. 1963년 존 에프 케네디에게 바치는 송사(頌辭)는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배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뿐이라 했다. 유명 역사가 말의 인용이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의사만 있다면 (이 비극적 사건 속에서도)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틀림없이 있다”고 했다.
여기 마대·파사의 시대에도 당연히 법과 정치와 지도자들이 있었다. 놀랍게도 성경의 중심인물 가운데서도 늘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다니엘과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바로 이때 활약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유대교 뿐 아니라 성경을 믿는 범 기독교인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물들이다.
다니엘이 마주한 마대의 후손 다리오
성경 계시에 등장하는 마대족 계열의 주요 인물에는 다니엘서(5:30-6:1)에 나오는 다리오 왕이 있다. 권력을 장악한 다리오는 다니엘을 총애하여 그를 전국 120도를 다스릴 바벨론 총리 셋 가운데서도 선임으로 세운 인물이다(단 6:3). 이 다리오는 성경 가운데 오직 다니엘서에만 언급된 인물이다. 또한 그는 성경에 나이와 혈통과 국적이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군주(단 5:30)이기에 인류 역사에 아주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 인물이 되었다.
이 같은 정보는 다니엘서에 나오는 메대 사람 다리오가 후기 페르시아(바사) 군주인 다리오 1세 히스타스페스(Darius Ⅰ Hystaspes, B.C. 522-486)가 아님을 증거 한다. 메대 사람 다리오의 아버지 이름은 아하수에로(Ahasuerus, 곧 크셀크세스)였다(단 9:1). 하지만 이 다리오의 아버지 아하수에로도 에스더 1장 1절에 나오는 페르시아왕 아하수에로(다리오 1세의 아들인 크셀크세스Xerxes 1세)와 혼동하면 안 된다. 즉 메대 사람 다리오는 페르시아 왕 아하수에로의 후손(아닥사스다 1세나 다리오 2세)들과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메대 사람 다리오는 이들 페르시아왕 다리오 1세나 아하수에로보다 더 앞선 시대의 사람이었다. 기원전 539년 10월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자 페르시아의 고레스 대왕(통치 기간 B.C. 539-530)은 그를 바벨론(갈대아)의 메대-파사 통치자(단 9:1)로 세웠을 것이다(단 1:21; 5:31; 6:28). 메대 사람 다리오는 바벨론 멸망(B. C. 539) 당시 62세(단 5:31)였으므로 주전 600-601년경에 태어났다(단 5:31). 역사가들이 말하듯 고레스는 다리오의 사위였던지 아니면 외손자였다. 이 부분은 성경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으니 성경으로 확인할 길은 없다.
성경 구약의 위대한 예언서 다니엘서는 요한계시록과 더불어 종말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이 가장 많이 제공하는 이방 인물은 벨사살이나 느부갓네살보다 메대 사람 다리오였다. 다리오는 다니엘을 시기하는 관리들의 계략에 속아 서명날인 한 메대-바사 법령으로 인해 신임하던 총리 다니엘을 하루 세 번 기도한다는 죄목으로 사자굴에 들어가게 만들기도 했다(단 6:7-18절).
그때 다리오는 놀라운 말을 한다.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기 바란다”. 흥겨운 풍악도 멀리하고 밤새도록 먹지도 않은 채 뜬눈으로 지샌 다리오왕은 새벽이 되자 사자굴로 달려갔다. 이때 다리오는 또 다시 다니엘에게 놀라운 말을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하나님이 너를 사자굴에서 구할 수 있었느냐?” 이렇게 유대민족과는 인연이 깊은 왕이었다. 모르드개와 하만의 경우처럼 다니엘을 고소한 자들은 그 처자들과 함께 오히려 자신들이 사자굴에서 비극의 삶을 마치게 되었다(단 6:19-24). 다니엘은 노예로 전락한 이방 포로의 후손에 불과했다. 하지만 다리오는 다니엘을 중요했다. 지도자들은 이렇게 다니엘 같은 참 되고 유능한 인물을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최고의 인재를 써도 쉽지 않은 국가 경영을 B급, C급 심지어 함량 미달의 인물을 책임자로 쓰면 무능할 뿐 아니라 국가를 베네수엘라나 그리스처럼 거덜 나게 만드는 것이다.
다리오는 페르시아 체제 가운데 벨사살왕과 같은 부(副) 통치자였으나 방탕했던 선왕(先王)과는 달랐다. 그는 큰 열의와 능력을 가지고 바벨론 지역을 다스렸으며 더욱 중요한 사실은 놀랍게도 그가 "다니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한 왕(단 6: 25-27)이었다는 점이다. 즉 메대-파사(지금의 이란)의 다리오나 고레스는 지금의 이란 통치자들과는 신앙적으로 전혀 다른 인물들이었다.
다리오 왕은 자신의 제국 안에 있는 모든 나라와 민족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린다. “이제 내가 선언한다. 내 제국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니엘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숭배하라.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니 영원히 다스릴 것이며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이요 그의 권세는 무궁할 것이다. 그는 구원도 하시고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과 땅에서 놀라운 일과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그가 다니엘을 구출하여 사자의 밥이 되지 않게 하셨다.”(단 6:25-27)
바사 왕 아하수에로와 모르드개와 에스더
기원전 490년 바사 왕 다리오 1세(Darius Ⅰ)는 전함 600척, 보병 10만, 기병 1만의 대병력으로 그리스 본토에 원정군을 보낸다. 그리고 아티카(Attica) 주의 동쪽 해안에 상륙시켜 마라톤 평야에 포진한다. 전쟁은 외형의 규모가 결정하지 않는다. 이 싸움에서 바사군은 아테네의 밀티아데스(Miltiades) 장군 휘하의 불과 1만의 병사들과 맞서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참패하고 만다. 바로 그 유명한 마라톤 전쟁(war of Marathon)이다. 이때 페이디피데스(Pheidippides)라는 병사가 약 2일간 240Km를 질주하여 아테네까지 와 승리를 알린 후 숨을 거두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바로 이를 기념하여 시작된 것이 마라톤 경기의 시발이다.
아버지 다리오 1세의 복수전을 준비한 바사왕 아하수에로(통치 기간 B.C. 485년 경-465년 경)는 바로 베냐민 후손 모르드개가 딸처럼 양육한 고아 에스더를 페르시아의 왕후로 간택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에 2:17). 아하수에로는 아버지를 대신한 아테네와의 복수전을 앞두고 벌인 전략 회의 겸 잔치에서 왕의 명령을 거역한 왕후 와스디를 폐위하고 에스더를 아내로 맞았던 것이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신앙적 용기와 모르드개의 전략에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유대인들을 멸절하려던 하만의 음흉한 계략은 그만 자신의 올가미에 자기가 걸려들었다. 그는 자충수에 걸린 것이다. 유대인들이 지금까지도 부림절을 최고의 명절 가운데 하나로 즐기고(?) 지키는 것이 이해가 간다. 바벨론에서 다리오에게 인정받은 다니엘이나 페르시아에서 현달한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주는 큰 교훈이 있다. 신앙은 이렇게 정치적으로도 권모술수가 판치는 세상에서 세상과 다르게 사는 것이다. 온갖 천박한 사이비들이 날뛰는 우리 정치사(史 )속에서도 다니엘과 모르드개와 같이 성경적 정의를 지키려는 빛나는 참 된 기독 정치인들은 늘 있었다. 그것이 위로가 된다.
여기 에스더의 남편 아하수에로는 파죽지세로 아테네의 코앞까지 진출하여 폭이 좁은 아테네 인근 살라미스만(灣)에서 11시간 계속된 역사상 유명한 살라미스해전(Battle of Salamis, B.C. 480년 경)에서 참패한 그 왕이다. 바로 13척의 배로 그 10배 이상의 전함을 가진 왜군을 상대한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 “울돌목 해전”의 원조 해전이었다!
전쟁은 외적 능력으로 결정되는 게 아님을 이렇게 역사가 증거 한다. 전력·화력·기동력에서 세계 5-6위권을 자랑하던 베트남은 탄약도 부족하고 군화도 없어 타이어를 깎아 만든 군화를 신고 진군한 월맹에게 속절없이 무너져 패망하였다. 거짓 종전 선언과 평화협정을 맺고 노벨상(물론 양심상 거부)까지 받은 공산 월맹의 노련한 레둑토의 전략에 그 똑똑한 미국 키신저가 말려든 결과였다. 수나라 우중문은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에게 조롱까지 당하며 살수에서 대참패를 당하였다. 승승장구하던 페르시아는 도시 국가 아테네의 “이순신”, 테미스토클레스의 계략에 말려 그렇게 당했다. 스스로 전방을 물러서고 입만 살아서 당나라 군대 화 되어가는 우리 정부의 군사정책을 보면 우려를 넘어 참담할 뿐이다. 또 다시 이순신 장군을 기대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모든 전쟁은 참혹한 비극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든 다니엘과 그 친구들 그리고 모르드개와 에스더처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남은 자들”이 있다. 그들은 영육 간에 진정한 승리자들이었다. 마치 약육강식의 정글과 유사한 세속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일꾼들은 이렇게 묵묵히 다른 삶을 산 사람들이었다. 기독교는 혐오종교라며 마치 점령군인양 교회와 성도들을 함부로 대하는 오늘날의 천박한 우리 정치인들이 명심해야 할 교훈이다.
오늘날 이란을 일군 페르시아의 초대 왕 고레스
페르시아의 초대 왕 고레스는 메대-바사 연합 왕국 페르시아를 일구어 오늘날의 이란의 토대를 일군 인정한 군주였다. 남한 면적의 18배에 달하는 큰 영토를 가진 대국인 오늘날의 이란은 우리나라처럼 산지가 많고 현재 전 인구 98%의 종교는 이슬람이다. 국가 공식 명칭도 이란이슬람공화국이다. 이란 왕정을 무너뜨린 이슬람 근본주의자 호메이니를 따라 오늘날 그 어느 나라보다도 강력한 시아파 맹주의 이슬람 왕국을 구축한 나라가 되었다. 이란은 한때 우리 민족을 먹여 살린 한국의 중동 지역 건설 진출이 가장 먼저 이루어진 국가였다. 과거 대제국 페르시아 왕국의 자존심을 세우려는 것일까? 이란은 지금 동서양을 통과하는 교통로에 위치하며 핵보유국으로 세계 초강대국 미국을 위협하고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나라로 성장하였다. 성경 역사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21세기 세계가 주목하는 국가로 등장한 이란은 과연 앞으로 어떤 길을 가게 될까?
어찌되었든 메대-파사는 생각보다 성경과 깊은 관련이 있는 민족임은 부인할 수 없다. 페르시아의 초대 왕 고레스(정확히는 고레스 2세, 통치 기간 주전 559-530)는 놀랍게도 성경에 예언된 왕이었다(스 1:3). 이사야 선지자는 고레스가 등장하기 200년 전 고레스에 대해 거듭 예언하고 있다. 이 예언은 이사야 41장에서 시작하여 48장(15절)에서 끝나고 있다(사 41:2, 사 44;21-28; 45:1,5; 46:11; 48:15). 에스라서 1장은 고레스가 마음이 감동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고레스는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詔書)도 내려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자기에게 주었고 자기를 명하여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라 공포하면서 포로들의 예루살렘 귀환과 성전 건축을 허락하고 물질적 도움과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스 1:1-4). 성경은 이것이 예레미야가 예언한 그대로 된 일이라 설명하고 있다(스 1:1).
고레스는 자기 이름이 그대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기에 이런 조서를 내린 것일까? 고레스가 참 된 신앙고백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성경 예언에 놀라고 큰 감동을 받은 것만은 틀림없다. 비록 대부분이 포로로 잡혀왔으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이미 지금의 이란 곧 메대의 고을들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레스처럼 성경 계시에 감동하고 다리오처럼 이란 통치자가 과연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가능할까? 이란이든 이스라엘이든 오늘날 온 중동의 나라들은 마음 밭이 온통 그곳 광야처럼 메마르기만 하기에 하는 말이다.
메대-바사(마대-페르시아)의 신제국 이란의 미래는?
과연 언제쯤 성경 역사의 땅 그곳에 참 찬양이 울려 퍼지는 날이 올까? 역사와 문화유산에 대한 자부심이 유달리 강한 이란은 다윗과 솔로몬처럼 어느 민족보다 시(詩)를 지극히 사랑하는 민족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얼마나 시(詩)를 좋아하시는 지 시인 솔로몬은 인류 최고의 지혜자가 되었고, 찬양 시인이요 음악가요 임금이었던 다윗은 성경 2930명의 실명 인물 중 유일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밧세바의 일을 제외하면 '내 마음에 합한 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최근 마대와 엘람의 후손 이란과 아브라함 후손 이스라엘과 핵문제로 다시금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앙숙인 이스라엘과 이란이 함께 더불어 중동 변화를 이끌 극적인 신앙적 회심의 역사가 언젠가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 이란이 2017년 “신라와 페르시아, 그 공동의 기억”이라는 전시회를 열었다. 이란(마대와 바사)은 정말 보기보다 우리 민족과 닮은 점이 많은 민족임이 분명하다. 물론 그 근거는 오직 성경에서 출발한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창조론오픈포럼 공동대표, 평택대 <신앙과 과학> 교수,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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