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학은 선악의 기준은 무엇이며, 그 기준이 어떻게 정립되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려는 학문이다. 진리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선악의 기준에 대해서도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서로 충돌하고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같이 일신론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절대적인 도덕률이 있다고 믿는다. 절대자인 신에서 유래한 변치 않고 명확한 기준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반면 범신론 혹은 다신론 세계관에서는 상대주의를 주장하며, 무신론에서는 절대적 윤리기준의 근거없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기준을 제시하려 노력하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을 향해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부르는 사람에게 “하나님 한분 외에 선한 이가 없느니라.”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윤리의 절대적인 기준이심을 알려주신다.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께서 선함의 기준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도덕률은 절대적이고 변함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이슬람에는 알라가 선한 것이 아니라, 알라가 선하다고 인정하는 것이 선이라고 규정한다. 코란에서 선하다고 알라가 인정한 것과 무함마드의 행전인 순나에서 드러난 그와 그의 동료들의 행위 역시 알라에게 인정받았기 때문에 선하다고 규정된다. 문제는 순나에 등장하는 무함마드의 행위가 일반적인 선과는 거리가 있고 심지어는 부도덕하거나 잔인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또한 코란의 규정과 순나의 규정이 서로 충돌하는 경우가 많은데 무엇이 우선이 될 것인지 해석하는 권위자에 따라 다를 수 있어 절대적 기준이라 주장하기는 힘들다. 선지자라고 하지만 신이 아닌 인간 무함마드를 선악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 문제이지만 이슬람의 무조건 복종이라는 권위주의에 의해 강제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세상의 교육을 통해 시대가 변하면 윤리의 기준도 변한다고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시대와 국가를 초월하여 도덕률 사이에는 공통적인 부분이 있다. 살인, 도둑질, 거짓말, 간음, 탐욕, 불효, 비겁함은 거의 언제 어디서나 규탄의 대상이 된다. 이런 도덕률 자체의 보편성과 유사성은 우연과 진화에 의존하는 자연주의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류공통의 도덕적 유산이 분명하다. 이 공통의 도덕적 유산을 누가 어떻게 정의하든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 밖에 어떤 완전한 도덕적 잣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이 완전하고 보편적인 도덕규범에 우리의 행동을 재어보는 버릇이 있으며, 그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에는 자기도 모르게 지키지 못한 이유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게 된다. 사람들은 그 규범을 인간본성의 법칙 혹은 자연법 (Law of Nature) 이라고 한다.
절대적인 기준 없이 정의는 존재할 수 없으며, 절대적인 윤리의 기준이 없을 경우 도덕성은 존재할 수 없다. 기독교 도덕성은 우리 밖에 절대적인 도덕률이 존재한다고 하는 믿음 위에, 또 그 절대적 도덕률이 우리 존재 속에도 새겨져 있다는 믿음 위에 세워져 있다. 이는 창조주의 본성에서 흘러 나와 피조물의 본성을 통해 흐르는 도덕성이며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 앞에 스스로를 드러내신 하나님의 일반계시이다. 이것은 사도 요한이 말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할 때의 그 빛이다. 또 사도 바울이 말한 “율법없는 이방인도 자기가 스스로에게 율법이 되는” 그 마음에 새겨진 ‘양심’이 뜻하는 것이다. 즉, 인간본성의 법칙, 자연법,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 혹은 양심으로 표현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스스로를 보여주신 하나님 즉, 절대선의 정체인 것이다.
한편 십계명이라는 구체적 기준을 통해, 산상수훈 같은 구체적인 가르침을 통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 전체를 통해 성경을 믿는 마음으로 읽는 사람들에게만 특별히 보여주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 즉 특별계시가 있다. 우리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통해 변하지 않고, 절대적인 도덕의 기준을 구체화할 수 있다.
절대자인 하나님을 부정하는 무신론적 세계관에서는 도덕성의 근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이성을 가진 자기 자신이 그 근원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개개인의 선악에 대한 판단이 사회 전체의 도덕적 표준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만일 개개인의 선악의 판단 너머 어떤 절대적인 것이 없다면,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그리고 집단과 집단 간의 갈등에서 누구의 도덕적 기준을 선택할 것인지를 판단할 최후의 수단이 없다. 그저 서로 갈등하는 의견만 가진 채 남겨질 뿐이다. 이것이 도덕적 상대주의의 치명적 약점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드러내신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통해 절대적인 도덕률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교회 밖을 나가면 이 무시할 수 없는 절대적인 도덕률에 대해 눈감고 귀막은 채, 그런 기준은 없다고 주장하는 이웃들을 만나게 된다. 그때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을 비난할 것인가? 그들에게 도덕률을 가르치려 할 것인가? 누구의 기준이 옳은지 싸울 것인가?
C.S. 루이스가 ‘순전한 기독교’에서 비유한 것처럼 기독교는 적이 점령한 지역에 합법적인 왕이 변장한 채 상륙해서 그 지역을 해방시키는 작전을 수행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 작전에 부름 받았다. 전쟁을 지휘하는 왕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도덕률을 제시하고 그것을 지킴으로 자기를 따르라고 명령한다. 우리들에 의해 그분의 법이 지켜지는 땅이 그의 나라이다. 그 법을 모르는 이웃들이 어떠하든 간에 그것이 시행되는 구역을 넓혀가는 것이 우리의 임무가 아니겠는가? 부활하신 예수님께 요한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베드로가 물었을 때 돌아온 답처럼 우리에게도 같은 대답을 하시지 않을까? “이 사람들이 절대적인 도덕률을 지키든 지키지 않든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묵상: 성에 대한 성경의 도덕률을 이 시대에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류현모(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분자유전학-약리학교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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