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행함의 문제를, 야고보서는 ‘수납’과 ‘증거’의 문제로 풀어낸다. 믿음은 ‘너희를 능히 구원할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행함은, 그렇게 받아들인 ‘마음에 심긴 말씀’을 온유함으로 다시, 계속해서 받아들일 때에 나타나는 ‘믿음의 행함’이다. 그 믿음의 행함의 열매는 ‘긍휼’이다. 사도 바울이 ‘사랑으로 역사하는(일하는, 행하는) 믿음’이라 한 것과 같다.
이렇게 야고보서가 ‘믿음 없는 행함’이 아니라, ‘믿음에서 나오는 행함’이라는 이해를 확실히 해 준 후에, 베드로전서는 교회의 ‘선한 행실’이 세상 속에 있는 교회에게 얼마나 중요한 기독론적, 선교적 의미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선한 양심, 선한 행실’에 실패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오늘 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그대로이다.
베드로후서는, 믿음에서 나오는 행함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나오는 ‘신적 성품’의 표현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단지 행함이 아니라, 그런 행함을 하는, 신적 성품의 사람들이 교회의 본질이요 사명이라는 차원으로 끌고 간다. 거짓 가르침을 이기고 하나님 나라, 그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그것은 그들의 행함이 아니라, ‘신적성품으로 변화된 그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요한일서가 본령이다. 요한은 믿음과 행함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생명’으로 풀어내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을 받았다면, 그 영원한 생명의 내용이 ‘나타날’ 것이다. 콩을 심었는데 팥이 나랴? 팥이 나왔는데, 콩일 것이라고 믿는 어리석은 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요한은 그런 경우 확실히 ‘팥이야’라고 단언하지만, 그렇게 못한다면, 합리적 의심이나, 확실한 경고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항간에, 바울의 서신들에서 ‘믿음’(fistis) 개념의 핵심을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 이해한대로 ‘충성’(loyalty)으로 이해하려는 흐름이 있다. 그럴 수 있는 본문들이 있다. 하지만, 루터가 말한 대로, ‘나의 밖에서부터 오는, 내가 한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역을 근거로 한 죄 사함, 부활생명’을 ‘그저 수납’함이 없이, 그 은혜나 생명이 나타날 리가 없다.
내 밖에서 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오직 은혜의 믿음’ 없이, 믿음은 전부 충성이며, 충성으로 받는 구원을 말하는 것은 단순히 ‘부정직한’ 해석이다. 하나님 백성의 충성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은혜를 선물로 받지 않는 심령이 충성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런 충성은 성경 밖에도 얼마든지 있다. 헬라 문화권에서 쓰던 ‘믿음’(‘충성’) 개념을 성경이 그대로 가져다 쓸 것이라는 생각도 ‘병행광’(parallelomania)적 발상이다. 성경은 세속적 개념들을 가져다 쓰지만, 복음 안에서 ‘재정의’(redefinition)해서 쓴다. 오염된 것을 어찌 거룩한 일에 그대로 쓰겠는가? 성경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바울이 하고 싶었던 것은, 주로 ‘그리스도를 믿음 없는 행함’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율법 아래서 율법의 행위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그토록 힘겨웠던 것이다. 그러나 ‘믿음에서 나오는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은 받은 것이 없는 것이다. 증거를 보여주지도, 목적을 이루지도 못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았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다. 이런 부분은 공동서신이 전문이다. 요한이 특히, 전문이다. 바울과 함께, ‘믿음과 행함’의 전모를 드러내는 것이다.
사도들은 힘을 합쳐, 단지 주님께서 ‘나는 포도나무라’(요 15:1)하신 것과 ‘열매로 그 나무를 알리라’(마 7:20)는 말씀에 주석을 달았을 뿐이다. 아래의 논문은, 공동서신에 나타난 ‘구원과 선한 행실’의 관계에 관한 내용이다. 교회에 도움이 되기만을 기도한다.
채영삼 교수(백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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