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교회 송태근 목사가 13일 주일예배에서 ‘비접촉 인생에 믿음의 접촉’(마9:18~26)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송 목사는 “성경에서 예수님의 말씀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의 동작 하나에도 그림 언어를 담고 있다”며 “본문에서 회당장 야이로의 열두 살 된 죽은 딸의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서 일어나셨다. 헬라어로 ‘에게이로’이다. 그런데 마태는 ‘일어나다’라는 단어를 ‘에게이로’라는 독특한 단어를 사용했다. 여기에는 깊은 의도가 숨어 있다”고 했다.
이어 마태복음 16장 21절을 인용해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핵심구절로서 여기서 ‘에게이로’는 ‘살아나다’라는 뜻”이라며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전형적인 용어이다. 마태복음 17장 9절을 통해 사망과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실 예수님의 향후 구원사역을 이 치유기사 속에서 드러내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요즘 상황이 얼마나 곤고하고 절망스러운가”라며 “아침마다 코로나 확진자 수에 눈을 뜨고 오늘은 몇 명이 확진이 되었는지 그 질병의 수치와 현상에 묻혀 희망이 없는 시대를 살아간다. 이러한 때에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에게이로’이다. 주님이 일어나시면 생명이 일어나고 모든 죽었던 자리가 깨어나고 회복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본문 19절에는 예수께서 일어나시니 제자들도 갔다고 했다. 이 제자 공동체는 오늘날 교회 공동체의 그루터기 같은 존재”라며 “예수님께서 사망과 죽음의 현장에 관해서 일어나 가시는 그 길을 교회도 따라가야 되는 것이다. 부활의 증인으로서, 권세를 가진 자로서 새 생명을 전하기 위해 따라가는 것이다. 지금은 선교가 중단되어 못 가고 있지만 코로나가 물러나는 때에 우리는 어떻게 선교를 할 것인가에 대한 희망과 꿈을 가지고 얘기를 했다. 답답하겠지만 새 날의 꿈을 가지고 시간마다 만들어 가길 바란다”고 했다.
그는 “본문 20절을 보면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겉옷을 만지는 일이 발생한다. 그 여인의 병은 혈루증이라고 되어 있지만 혈루증은 혈루증상이지 병이 아니다. 부인과 계통의 질병으로서 끊임없이 하혈을 하는 병”이라며 “레위기에서 보면 이 여인은 부정한 여인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타인도 격리를 해야 하지만 본인 스스로도 격리를 해야 되는 비접촉 시대 원조의 고독한 인생”이라고 했다.
이어 “12년 동안이나 이 고통 속에 살아왔던 이 여인의 삶을 생각해 보자”며 “돈도 없고 몸은 더 망가지고 공동체에서 제외되어 누구도 접촉하고 함께 할 수 없는 외롭고 무서운 고독 속에서 희망 없이 살아가던 어느 날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라고 했다.
또 “예수님께서 일어나시면 헬라어로 ‘소조’, 바로 구원이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을 하시고 그 즉시 여인이 구원을 받았다고 했다”며 “소조(구원)라는 단어 대신에 ‘치료되었다’는 말이 들어가야 될 것 같다. 그러나 더 큰 범위에서 구원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구원은 육신의 고통까지 포함한 완전한 회복을 말한다. 비접촉 인생을 살 수밖에 없던 여인의 믿음의 터치가 인생을 바꾼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본문 24절에서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으로 가서 ‘물러가라’는 말씀을 하신다”며 “여기서 물러가라는 귀신들을 내쫓을 때 자주 하신 말씀이다. 영의 세력은 존재한다. 어둠의 권세에 묶여 하나님의 영의 세력을 알지 못하고 자기들이 주인인 양 이 세상을 장악하고 동조함으로 내쫓은 것이다. 우리도 코로나19와 모든 절망과 우리를 무너뜨리는 모든 것들에게 예수의 권세를 가지고 물러나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송 목사는 “우리가 비대면 예배를 드리는 것도 정부방침 때문이 우선적 의미가 아니”라며 “어떤 권력기관과 정부도 교회를 향해서 예배를 이렇게 해라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상황을 언제까지 허락하실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 속에서 고요히 하나님의 움직이심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려야 한다”고 했다.
이어 “예수님께서 이것을 보시고 어둠의 세력에, 준동하는 세력들에게 물러가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 신앙의 야성과 담대함이 다시 한 번 우리 모두에게 회복되고 살아나기를 바란다”며 “사람들은 비웃었다. 예수님께서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비웃은 것은 영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또 “혈루병을 앓던 여인에게는 예수님이 터치를 당했다. 율법대로라면 예수님이 부정을 입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더 나아가 스스로 시체에 손을 댔다. 예수님이 부정해진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서 그 부정을 입으시고 대신 우리의 죄 짐을 지시고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라며 “여인은 사회적으로 죽은 자였으며 소녀는 생물학적으로 죽은 자였다. 그들의 부정함을 입어 십자가에 죽으시고 대신 여인과 소녀에게는 새로운 인생과 생명이 회복된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열 둘’이라는 수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며 창세기 49장 28절과 마태복음 19장 28절, 요한계시록 21장 12~14절을 인용해 “성경 전체의 의미는 하나님의 경영에 숫자이며 이스라엘의 완성에 숫자이다. 그리고 소망이 없고 절망에 놓여 진 이스라엘의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오늘날 이 땅의 상태 또한 반추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질병에 떨고 공포에 붙잡혀 죽음 앞에 두려워 할 수밖에 없고 죽음의 권세에 묶여 있는 이 세상에 예수를 알지 못하고 핏기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에게 그리스도 외에는 소망이 없음을 선포하며 가르치기 위해 일어나 사망과 죽음의 현장으로 주님이 오신 것이다. 그러자 이 땅에는 구원이 시작된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길을 따름으로 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어나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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