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문희>라는 영화는 어머니와 아들이 힘을 합쳐서 뺑소니 사건의 범인을 잡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에게는 끔찍이 사랑하는 어린 딸이 있는데 그 딸이 뺑소니 사고를 당합니다. 이후 어머니와 아들은 범인을 잡기 위해 좌충우돌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가족애를 확인하게 되지요. 영화는 관습적인 흐름대로 진행됩니다.
영화에서 주목할 것은 사고 현장의 유일한 목격자인 어머니가 치매 환자라는 것입니다. 영화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돌발적이고 엉뚱한 행동을 주된 소재로 삼아 한바탕 소동극을 펼쳐 보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간과할 수 없는 흠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치매 노인을 다루는 영화의 방식입니다. 이 영화는 치매 노인에게서 유발될 수밖에 없는 엉뚱한 상황을 코미디의 소재로 써먹고 있습니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이 영화가 치매 노인을 희화화하지는 않았다고 평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전적으로 치매 노인을 연기한 여배우의 열연 덕분일 것입니다. 소재의 단점을 배우의 명연기가 어느 정도 상쇄시켰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치매는 현재까지 딱히 치료약이 개발되지도 않은 대단히 무서운 질병입니다. 우리 사회의 고령화가 심해지면서 치매 환자의 수가 빠르게 증가함은 물론, 이로 인해 가족 간의 갈등 및 가족 해체가 야기될 정도로 치매는 심각한 사회문제이기도 하지요. 오죽하면 헐리우드 영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2011)이 치매를 이야기의 발단으로 삼았을까요. 이 영화의 주인공은 과학자인데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치료하려고 약을 개발합니다. 이 약의 임상시험을 위해 유인원들이 이용되고, 약물을 투여받은 유인원들이 마침내 인간 이상의 지능을 갖게 되어 인간들을 공격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 치매라는 소재는 잠깐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치매가 현재 동서양을 막론한 전 세계적인 사회문제임을 짐작하게 합니다
치매는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무서운 질병입니다. 낳아주고 길러준 어머니가 자식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가슴 아플까요. <오!문희>에서도 이와 유사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만약 이 장면이 관객을 웃기려는 의도에서 연출되었다면, 영화의 최종목표가 무엇이든 간에 지지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치매 환자의 증세는 웃음의 소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패착이자 흠결은 치매 환자를 웃음거리로 삼았다는 점입니다. 치매에 대한 성숙한 시선이나 노인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그저 얄팍한 웃음을 손쉽게 얻어내려고 했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관객을 웃기는 데 성공했다고 보기에도 어렵습니다. 이 정도의 서사를 진행하기 위해서 주인공이 꼭 치매 노인이어야만 했을지도 의문입니다.
대략 이십여 년 전, 시골 마을의 노인들이 출연해서 퀴즈를 푸는 공중파 방송 프로그램이 크게 인기를 끈 적이 있습니다. 출연한 노인들은 치매 환자는 아니었지만 대체로 문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사고방식이 젊은 세대와는 아주 달라서 엉뚱하고 기상천외한 답변을 많이 하는 편이었습니다. 시청자들은 그런 노인들의 모습을 보며 포복절도하기도 했지요. 이 프로그램은 큰 인기를 끌었지만, 한편으로는 노인들의 약점을 웃음거리로 삼았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타인의 약점을 희화화했다는 것이지요.
<로망>(2019)이라는 영화도 치매 노인을 다루는데 특이한 점이 있다면 노부부가 함께 치매를 앓는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치매에 걸린 노부부를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억지로 무게를 잡지 않고 함부로 관객을 가르치려 들지도 않습니다. 치매라는 실존적인 소재를 다루면서 최소한 가벼운 태도를 취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지요. 타인의 약점이나 불행을 유머의 소재로 삼는 것이 유머의 성공 여부와는 별개로 잘못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의 태도는 <오!문희>와는 대조적이며 그 자체로 호평받을 만합니다.
<너티 프로페서>(1996)의 주인공은 대학교수입니다. 과학자로서 능력은 출중하지만, 워낙 뚱뚱한 외모 때문에 연애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는 다행히도 첫눈에 반한 여성과 데이트를 하게 되고 코미디 클럽에 가게 되죠. 그런데 거기서 사달이 납니다. 클럽의 코미디언은 손님의 약점을 잡아서 개그의 소재로 삼아 왔습니다. 자신이 지목한 사람을 무대 위에서 깎아내리면서 계속해서 희화화하는 것이죠. 아니나 다를까 주인공이 도마 위에 오르게 됩니다. 코미디언은 주인공의 뚱뚱함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손님들에게 재미를 선사합니다. 데이트가 망가졌음은 물론이고 주인공 커플은 마음이 크게 상하지만, 클럽의 손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재미있어합니다. 이 에피소드는 손쉽게 약자를 유머의 소재로 쓰곤 하는 우리의 습관적 태도를 돌아보게 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사회는 장애우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웃음의 소재로 즐겨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저명한 코미디언이 연기했던 ‘영구’라는 캐릭터는 그 실례가 되겠지요. 장애우에 가까웠던 ‘영구’의 모습이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준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만약 가족 중에 그런 장애를 가진 이가 있다면 코미디를 재미있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는 단기간에 산업화와 경제발전을 이뤄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생산의 효율성이 요구되었으며 자연히 사회 전반에 걸쳐서 획일성이 중요하게 여겨졌지요. 그러다 보니 획일성의 잣대에서 부족한, 즉 효율성이 덜하다고 판단되는 장애우들에 대해서는 배척하거나 아예 희화화하려는 사고방식이 우리의 무의식중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치매는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질병의 결과입니다. 그러니 치매 환자가 유머의 소재로 소비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치매에 걸리고 싶은 사람도, 늙어서 쇠약해지길 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왕 다윗은 젊은 시절 용맹스러운 전사였습니다. 이방 민족과의 전투에서 수차례 승리를 이끌어낸 위대한 장군이기도 했지요. 그런데 성경은 그의 노년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다윗 왕이 나이가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열왕기상 1:1).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이 이렇게 늙게 될지 누가 알았을까요.
성경은 다른 이의 약점이나 불행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것을 강하게 책망합니다. 유다는 바벨론의 침략을 당해서 황폐하게 되었는데요. 바벨론 사람들은 성전에 쳐들어와 성물을 부수고 살인을 자행했습니다. 유다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가기도 했죠. 이때 이웃 나라 암몬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면서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즐거워했습니다. ‘아하 좋다’ 이렇게 탄성을 지를 정도였지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암몬을 향해서 진노하시며, 그들이 웃음거리로 삼았던 유다와 마찬가지 신세가 되어 버릴 것이라고 멸망의 심판을 선언하십니다(에스겔 25:3-7).
예수님은 어떠셨을까요? 로마 군병들에게 십자가의 예수님은 웃음거리일 뿐이었습니다. 온 세상의 구원자임을 자처하면서 자기 몸 하나 구해내지 못하니, 유머의 소재로 쓰기에 딱 좋았겠지요. 성경은 그들이 예수님을 ‘희롱했다’고 진술합니다(마태복음 27:29).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인류 구원의 유일한 통로임을 몰랐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 선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지 못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웃음은 많은 경우 타인의 약점 내지는 불행으로부터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고 훈계했습니다. 치매 노인을 다루는 데 있어서 <오!문희>는 얄팍하고 미흡했습니다. 할 거면 잘했어야 하고, 아니면 아예 시도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치매 노인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장애우를 묘사하지 않더라도 세상에는 얼마든지 풍성한 소재가 많이 있습니다. 영화가 약자를 대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를 함의합니다. 약자의 고통을 보여주겠다면서 그 고통을 전시해서도 안 될 것이고 신파에 사로잡히지 않겠다면서 고통을 희화화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노재원 목사는 현재 <사랑하는 우리교회>(예장 합동)에서 청년 및 청소년 사역을 담당하고 있으며, 유튜브 채널 <아는 만큼 보이는 성경>을 통해 기독교와 대중문화에 대한 사유를 대중과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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