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전도사는 “저는 고향이 북한 함흥이다. 어머니는 전쟁고아로 비행기 파편이 배에 스쳐 가서 화상을 입었다. 그래서 저희 어머니는 배꼽이 없고 뱃가죽이 화상으로 쪼그라들어 늘어나지 못해 임신을 포기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선택하심으로 저는 태어나게 됐다. 저는 북한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하게 살았었다. 그러나 결혼이 불행을 안겨줬다”며 “행복한 순간도 잠시 사랑하는 딸을 세 살 되던 해에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내게 됐다. 응급실에 있던 아이를 94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이라는 당치도 않은 이유로 의사들이 행사에 참여해야 한다며 강제 퇴원을 시켰다. 아이가 죽고 저는 정신을 잃고 3일 만에 깨어났다. 저는 제 아이가 언제 어떻게 눈을 감았는지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른다. 20년이 넘었지만, 가슴에 묻은 아이에 대해서는 지금도 눈물이 난다. 슬픔에서 깨어나지도 못 했는데 저는 살인자, 아이를 제대로 키우지도 못하는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 유서를 쓰고 양잿물을 마시고 자살을 시도하려 했었다”고 했다.
이어 “자살을 하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다정한 말이 들렸다. ‘왜 죽으려 하느냐 죽는 것이 최선이냐. 너의 귀중한 목숨을 버릴 것이냐’는 소리가 들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양잿물을 마실 수 없었다. 지금도 하나님을 몰랐던 시기에 귓가에 들린 소리를 잊지 못한다. 저는 아이를 죽였다는 이유로 이혼을 당했고 이혼당한 저를 보고 아버지는 뇌출혈로 돌아가셨다. 제정신을 가지고 이곳에서 살 수 없어 떠나자는 생각을 했다. 마침 중국에 친척이 있어 무작정 두만강을 건너 친척 집에 찾아갔다. 탈북자를 잡는 공안을 피해 숨어 살기도 했다. 그래서 중국을 떠나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한국에 가기 위해 무작정 북경에 갔다. 북경에 가면 한국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갔다”고 했다.
김 전도사는 “한 달 동안 돌아다녔는데 한국 사람을 한 명도 만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시고 교회로 인도해 주셨다. 한인교회 선교사님의 도움으로 한아파트에서 지내며 하나님을 만났다. 몇 번이나 한국으로 가는 길이 무산됐었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잘한 선택인가 갈등하기도 했다. 한국에 가는 길이 너무 어렵다는 걸 알게 됐고, 하나님에게 매달렸다. 그래서 성경공부를 하며 밤낮으로 성경을 필사했다. 성경을 필사하며 하나님에 대해 더 알게 됐다”며 “구약 성경은 2개월 신약 성경은 1개월이 걸려 필사하며 저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매일 엎드려 한국에 보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됐다. 20명의 탈북민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됐다. 갑자기 맑고 푸른 하늘에서 ‘수고하고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쉬게 하리라’는 음성이 들렸다. 꿈에서 북경에 있는 한국 영사관을 보게 됐다. 꿈에서 주님께서 공안들을 치워주셨고 아무런 제제 없이 영사관에 들어가게 됐다. 꿈에서 본 영사관은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었다. 찬송가 202장을 부르며 행진하는 게 보였고, 군인 10명 정도가 길을 막는 것을 보여주셨다”고 했다.
이어 “하나님이 꿈에서 보여주신 계획을 3일 후에 행동으로 옮기셨다. 밤 10시에 선교사님들이 북경에 있는 한국 영사관에 가보자고 했다. 그냥 영사관에 들어가는 것이 두려워 고춧가루 폭탄을 중국 공안에 던지고 영사관에 들어갔다. 믿음으로 들어가면 순탄하게 한국에 보내졌을 텐데, 공안에게 고춧가루를 던져 공무집행 방해로 한국에 가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7~8개월 영사관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됐다. 그때 170명 정도의 탈북민이 있었는데, 주일마다 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인도하시는 한국 전도사님이 한국에 돌아갈 때쯤 새로운 전도사님들을 보내주셨었다. 그때 하나님이 계심을 실감하게 됐다. 그리고 대한민국에 하나님의 은혜로 입국하게 됐다. 옛날에는 탈북민 정착을 도와주시는 분이 안 계셔 모든 것을 혼자의 힘으로 해야 했다. 한국에 와 자유를 누리고 싶어 교회를 떠나기도 했다. 하나님은 인내하시고 사랑으로 보듬어주시며 기다려 주셨다”고 했다.
김 전도사는 “한참 방황하던 저에게 하나님이 ‘이제는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교회에서 회개하며 기도하고 한국에 오기 전 간절히 서원했던 걸 기억하게 하셨다. 그때야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안 따르면 혼날 것 같은 두려움이 생겨 감리교 신학대학교 목회신학 대학원에 입학하게 됐다.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야 사회에서 살아나갈지 고민하며 익혀나갔다”라며 “현재 사회복지학 박사학위를 받고 부천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감리교 신학대학원을 8월에 졸업해 전도사의 삶을 준비하고 있다”며 “모든 삶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계셨고 모든 삶을 주관하시는 분도 하나님임을 고백한다. 먼저 많은 탈북민을 구출해 주시고 부족한 저를 인도해 꿈을 향해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오늘을 있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드린다. 하루빨리 변화가 있어서 탈북민들이 가족을 만나고 저처럼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그 날이 오기 위해 많은 기도 부탁드린다. 복음 통일이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한마음으로 기도하길 소망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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