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근 목사(삼일교회)가 16일 주일예배에서 ‘나를 따르라’(마8:18~22)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이날 예배는 최근 교회에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한 이후 처음으로 드려진 주일예배이다.
송 목사는 “‘따른다’는 것은 제자들의 필연적인 인생의 각오”라며 “오늘 본문에는 ‘따르겠다’는 두 명의 인물이 나온다. 한 명은 서기관이며 또 한 명은 무명의 제자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왕국은 임했다. 그 분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가 익숙하고 견고했던 삶의 터전을 떠난다는 이야기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우리의 시민권과 신분을 새로운 왕국으로 옮겨가는 과정의 길을 떠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삶을 순례자의 삶, 히브리서에는 나그네의 삶으로 묘사한다”고 했다.
이어 “우리는 이제 본격적인 순례자의 길 또는 나그네의 삶에 들어선 것”이라며 “그것이 제자로서 주를 따르겠다고 고백한 자들에 기본적인 토양이다. 이 세상이 어떤 감각으로 느껴지며 나그네의 삶 같이 느껴지는지가.”를 물었다.
그러면서 “본문에는 서기관 한 명이 등장하며 느닷없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다”며 “서기관은 율법학자이며 생활적으로도 절박한 사람은 아니었다. 사람에게 호칭은 중요하다. 모든 제자들은 예수를 ‘주여’라고 불렀지만 유독 다르게 부른 제자가 있었으니 바로 ‘가롯 유다’이다. 그는 ‘랍비’(선생님)라고 불렀으며 그의 종말은 비참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본문에 서기관도 주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아직은 그가 쫓겠다는 분이 어떤 분인지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는 말을 어느 학자는 ‘학문적 관심을 가진 우호적인 추종자였을 뿐’이라고 했다. 즉,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길을 이해하고 온전히 동의가 되어 따르겠다는 것이 아니다”며 “그런데 뜻밖에 교회 안에 이런 아류의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교양 과목 중 하나로 기독교를 생각하며 액세서리 정도로 여기며 사람들이 따르는 인기와 부귀에 목마른 사람이다. 본문 속 서기관도 이런 부류의 사람임을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된다”고 했다.
또한 “예수님의 대답은 세상의 권력자의 한복판에 있는 자들은 자신의 보금자리를 위해 살며 보금자리가 있다”며 “그러나 ‘나는 이 땅의 왕, 하나님의 아들로 왔지만 내가 가는 길은 영광과 부귀 약속된 길이 아니다’며 냉엄하게 그를 돌려 세운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또 한 명의 무명의 제자가 주를 따르겠다고 한다. 이 당시에는 결혼식도 중요했지만 장례식도 평판에 중요한 예식이었다. 그래서 허례허식의 장례식도 많았다”며 “세상에서도 기독교인을 많이 폄하 하는 말이 애미애비도 모르는 종교라고 한다. 대표적인 예가 제사이다. 그러나 성경을 꼼꼼히 살펴보면 기독교만큼 효에 대해서 강조하는 종교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십계명 중에 1계명부터 4계명까지가 대신관계이다. 그리고 5계명부터 10계명까지가 대인관계를 말하는데 그 첫 번째 계명(5계명)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라며 “여기서 ‘옳다’는 말은 하나님께 창조된 인간이면 본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제사는 우상숭배와 직결되기 때문에 금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또 “무명의 제자는 예수를 따르기 전에 아버지를 장사하고 오겠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태복음 8장 22절에서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했다”며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모든 삶의 첫 자리를 예수님께 이양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부귀영화를 위한 액세서리나 보조도구가 아니다. 기독교는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의 삶을 올인 하는 것이다. 이것이 제자도에 첫걸음”이라고 부연했다.
송 목사는 “코로나19가 우리의 모든 일상을 흔들고 있다”며 “사람의 마음에는 염려와 두려움이 몰려 있다. 이를테면 교회는 어떻게 되고 우리는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염려를 시작으로 직장과 장사 등등 보통 영역에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고 했다.
이어 “본문 23절부터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에 오르게 되고 강한 풍랑을 맞는다”며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지만 예수님은 편하게 주무시고 계신다. 코로나 검사를 받고 목양실에 갇혀 있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과연 이것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또 “제자들이 위태로운 상황 가운데 주님을 부르짖는다. 우리가 습관처럼 부르는 ‘주님’이라는 말, 우리는 어떤 뜻으로 부르짖는 것인가.”라며 “주님이라는 말은 자신을 포함한 만물의 주권자이며 주인이라는 뜻이다. 모든 경영과 운영이 그 분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본문에 제자들도 주님을 부르짖지만 혼돈에 빠져 있다. 입은 ‘주여’를 부르짖지만 이들의 행동은 주님이 없다. 이중적인 모습”이라며 “예수님은 이들의 믿음을 지적하신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를 따르겠다고 배에 올라 탄 공동체인데 주님은 ‘믿음이 적은자들아 왜 무서워하느냐’고 말씀 하신다. 조금한 불행한 소식 앞에도 겁먹고, 주눅 들고, 위축된다. 믿음이라는 것은 풍랑이 일어날 때 필요한 것이다. 믿음은 모든 것이 편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보통 우리는 기도하기를 요술방망이 부리듯 한다. 믿음이란 시간 속에서 풀어내지는 장면”이라며 “우리는 여러 가지 문제에 있어 염려하고 근심한다. 물론 준비하고 대비를 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의 역사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방도를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강조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것에 오히려 역설적인 초점이 있다”고 했다.
아울러 “예수님에게는 풍랑과 그것을 다스리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며 “우리가 따름의 길을 가는 여정에 수많은 일들을 만나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다. 이 약속의 말씀이 모든 성도들에게 큰 원칙이 되고 기초가 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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