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라는 영화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좀비로 인해 폐허가 되어 버린 한국사회를 그리고 있는데요. 좀비는 야만성과 공포를 상징하기에 최근 포스트 아포칼립스(대중문화가 인류의 종말적 모습을 다루는 것을 지칭)를 그리는 창작물에서 단골로 사용되는 소재입니다.
그런데 좀비의 무서운 점은 그것이 극악무도한 파괴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좀비는 총이나 칼을 맞으면 죽습니다. 심지어 <부산행>(2016)에서는 야구방망이에 제압을 당합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영화 속 마동석처럼 완력이 강하다면 얼마든지 싸워서 이길 수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최근 한국영화가 그리고 있는 소위 ‘K-좀비’들은 무척 빠르고 맹수보다 더 게걸스럽기는 하지만, 인류가 이겨내지 못할 존재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비가 두려운 건 극도의 전염성 때문입니다. 물론 의학적으로는 말이 안 되지만, 좀비에게 물리면 손 쓸 겨를도 없이 같은 좀비가 되어버립니다. 게다가 한 번 좀비가 되면 치료할 길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 이유로 좀비에게 물리면 <부산행>의 주인공처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자결을 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극도의 전염성, 가장 가까운 사람이 한순간에 가해자로 변해버릴 수도 있다는 의외성, 그리고 모두가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점들이 좀비가 우리에게 주는 공포의 실체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영화 속 좀비는 특정한 사회현상에 대한 은유로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1950년대 미국을 휩쓸었던 ‘매카시즘 광풍(狂風)’은 무고한 동료를 공산주의자라고 밀고하게끔 했는데요. 매카시즘의 특징이 가까운 동료에 대한 공포, 언제 당할지 모른다는 의외성, 한 번 걸리면 회복할 수 없다는 치명성 등이었기에 좀비를 다룬 영화들은 매카시즘에 대한 은유로 해석되기도 했으며 최근에도 ‘매카시즘’이라는 단어는 ‘좀비’라는 단어와 자주 함께 사용되곤 합니다.
이렇게 좀비 영화는 당대의 불안감을 반영한다는 것이 정설인데요. 좀비 영화의 고전으로 불리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의 경우 1960년대 후반 미국 사회가 겪고 있던 베트남 전쟁에 따른 불안과 공포, 그리고 인종 차별로 말미암은 사회적 분노를 좀비라는 소재를 통해 그려낸 바 있습니다. <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속 배경이 되는 한반도의 모습에는 자연히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을 마주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모습이 투영됩니다.
<반도>에서 정말로 두렵고 혐오스러운 존재란 좀비가 아니라 영화 속 군인들처럼 야만적이고 속물적인 인간군상입니다. 이는 좀비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연출방식이기도 한데요. <부산행>을 비롯한 좀비물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지독하게 이기적이거나 악랄한 캐릭터가 등장함으로써 타인에 대한 현대인의 무의식적 공포를 함의합니다.
좀비물의 특징 중 하나는 중요한 인물을 결정적인 순간에 좀비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극적 재미를 주는 것인데요. 조금 전까지 가족이나 동료였던 사람이 좀비가 되는 것, 피해자이지만 이제 곧 가해자가 되어버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은연중에 관객으로 하여금 일상을 함께 하는 타자에 대해 경계의 자세를 견지하게끔 합니다. <#살아있다>(2020)에서 좀비가 된 소방대원이 정상인일 때처럼 로프를 능숙하게 타는 장면들 또한, 우리가 지금 살을 맞대고 있는 가족과 동료가 재앙의 대상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하지요.
이렇듯 좀비물은 현대사회의 불안과 공포를 반영하고 있으며 좀비물이 제공하는 혐오의 정서는 자연히 관객으로 하여금 타자와의 유대를 꺼리거나 배타적 태도를 갖게 합니다. 좀비물은 아니지만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인기 웹툰도 타자에 대한 현대인의 불안을 잘 반영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러한 좀비물의 영화적 장치나 표현기법들은 공동체를 통해 신앙 활동을 하는 현대 기독교가 코로나19라는 초유의 위기상황을 맞은 것과 비교할 만합니다. 코로나19는 강력한 전염성 때문에 사회구성원 간의 대면과 접촉을 꺼리게끔 하며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비대면 방식을 고안해내야 할 정도로 생활양식 자체를 바꿔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폭적인 변화는 ‘모이기에 힘쓰는’ 기독교의 신앙방식에도 불가피한 변화를 가져오게끔 했습니다.
기독교는 한정된 공간에 많은 사람이 모이는 ‘예배’라는 신앙의 형식을 갖고 있어 일견 감염에 취약할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최근 좀비물이 취하는 전략 중의 하나는 폐쇄된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것입니다. <부산행>은 KTX 열차 안에서, <월드워 Z>(2013)는 항공기 안에서, <#살아있다>는 복도식 아파트 안에서 좀비들과 사투를 벌이는데요. 이렇게 폐쇄된 공간에 주인공을 몰아넣고 좀비와 맞닥뜨리게 하는 방식은 관객의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끌어올립니다.
이렇게 밀폐된 공간에 대한 두려움은 한정된 공간에 다수가 머무르는 기독교의 예배방식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연결지을 수 있습니다. <반도>를 비롯한 좀비 영화들은 마치 기독교에 대한 현대사회의 거부감 내지는 기독교가 직면한 어려움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이제 기독교는 좋든 싫든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좀비 영화는 비관적인 세계관만을 보여준 채 끝나지는 않습니다. <반도>에서 등장인물들은 협동을 통해 문제를 해결합니다. 타자를 위해 주저함 없이 자신을 희생하기까지 합니다. <부산행>에서도 우악스러운 건달, 남루한 걸인, 말쑥한 증권맨은 함께 연대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해 나갑니다. <#살아있다>에서 남자주인공은 절망 끝에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하지만, 맞은편 아파트의 생존자를 통해 희망을 얻고 서로에게 힘이 됩니다. <엑시트>라는 재난영화에서도 남녀주인공은 수퍼 히어로가 아니라 오히려 번번이 취업에 실패하거나 계약직에 불과한 소위 ‘루저’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연대와 협동을 통해 위기를 극복해 냅니다. 이렇게 좀비영화 내지 최근의 재난영화들은 한결같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은 연대에서 나온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전염병의 창궐로 반기독교 정서가 절정(?)에 달해 보이는 지금, 기독교의 돌파구도 바로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다른 동물에 비해 육체적 능력이 뛰어나지 않은 인간이 문명을 이루고 현재까지 지구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협동과 연대를 통해서였습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인간은 연대를 통해서 위기를 극복해 왔습니다.
이 초유의 위기상황에서 기독교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더 겸손해지며, 서로 연대할 때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도서 4:12)
노재원 목사 / 한때 건축을 전공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목사. 유튜브 채널 <아는 만큼 보이는 성경>을 통해 성경과 문화에 대한 기독교적 사유를 대중과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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