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들은 서사가 세상의 실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할 수 있다고 쳐도 어떻게 서사가 구원을 전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서사가 어떻게 구원의 기능을 할 수 있는지 물으면 많은 이들이 어리둥절해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서사에 이끌려 우리가 자신의 죄와 복음의 성취와 기쁨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이 서사는 과거를 등지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싶게 만든다. 하나님의 변화의 은혜를 향해 우리 삶을 열어젖히고 싶게 만든다. 많은 중세 신학자들에게 친숙했던 비유를 들자면, 이것은 덧문을 열어 어두운 방에 빛을 들이는 일과 같다. 덧문을 여는 일이 은혜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인간의 행위라면, 뒤이어 방에 빛이 비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에 해당한다. 우리는 해가 비치게 만들 수 없고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게 만들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를 태양의 열기와 빛으로, 하나님의 변화의 은혜를 받는 사람으로 만드는 일은 할 수 있다. 이미지를 바꿔 보면, 기독교 이야기는 우리가 병들었음을 깨닫고 치료를 구하게 만들 수 있다. 이야기 자체는 우리를 치료하지 못하지만, 복음이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치료받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이야기는 치료 수단이 될 수 있다.
- 알리스터 맥그래스, <포스트모던 시대, 어떻게 예수를 들려줄 것인가 >
그러므로 우리는 마치 자신이 기도의 거장인 양 가장하거나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어떤 일을 결단할 필요가 없다.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므로,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신앙의 영역에서 실로 미숙한 자신의 모습을 솔직히 받아들이고, 우리 마음속의 바람을 그분 앞에 정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교제가 성숙해지는 길은 바로 여기에 있다.
- 마이클 리브스, <기도하는 즐거움>
분노하는 것은 항상 죄인가? 어떤 사람들은 분노하는 것은 언제나 죄라고 진심으로 믿는다.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어떤 형태로든 분노를 표현하는 건 잘못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기를 겨냥하지만 않는다면 분노는 절대 악하지 않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부모는 자녀가 부모나 형제자매에게 분노를 표현하는 건 참지 못하지만, 자신이 자녀에게 분노를 표현하는 건 핑계를 대고 넘어간다. 자기에게 적용하는 기준과 배우자에게 적용하는 기준을 달리하는 남편과 아내도 있다. 어떤 남자의 말에 따르면, 자기가 아내에게 화내는 건 언제나 정당하단다. 이런 사람들은 타인의 분노는 대체로 옳지 않지만, 자신의 분노는 옳다고 생각한다. 이 사안의 진실은, 분노는 때로는 악하고 때로는 의롭다는 것이다.
- 웨인 맥, <분노와 스트레스, 하나님의 방법으로 다스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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