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근 목사(삼일교회)가 17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제목으로 주일예배에서 설교했다.
송 목사는 “코로나로 인한 강력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작되면서 개인들이 빠르게 고립되어 갔고, 신천지를 통한 집단감염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불신과 우울함을 호소하게 되었다”며 “자신의 생존과 안전을 위해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하는 불신사회의 도래는 이기적 자아에서 이타적 자아로, 더 나아가 공공적 자아로의 인식전환이라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고 했다.
이어 “코로나 사태로 인해 도시라는 문명 공동체는 개인이 혼자 깨끗하고 잘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연대와 관계와 책임이 분리될 수 없는 사회”라면서 “공공의 자아, 공공의 선을 교회는 어떻게 구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과제를 안게 되었다. 교회는 화해와 신뢰를 위한 공간이어야 한다. 교회는 이 도시공동체에 대안적 공동체로서 원리를 드러내고 가치관을 설명해야 한다”는 한 신학대 교수의 글을 인용했다. 그는 “세계사적 위기의 작금의 코로나 사태가 예수님께서 설명하신 화평이라는 주제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또 “예수님 당시의 화평, 평화는 어떤 의미였는가. 예수님 당시 세계패권을 장악한 로마제국이 추구했던 국가개념, 제국의 철학은 팍스로마나(Pax Romana)였다. ‘팍스’는 평화라는 뜻으로 ‘평화로운 로마’가 로마제국이 추구했던 국가 통치개념이었다”며 “그런데 그 평화는 힘과 물리력, 업악과 통제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모순적 평화였다. 로마제국은 침략한 나라들에 대해 종교관용 정책을 펼쳤으나 로마의 평화, 즉 로마의 질서를 깨면 가혹하게 다스렸다. 사도들을 붙잡아 고문하고 체포했던 것도 기독교를 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를 전파함으로써 일어나는 분란과 소요 때문이었다. 로마의 질서와 평화를 깨는 자에 관해서는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던, 힘으로 유지하는 허구의 평화였다. 이 평화의 속성은 오늘날 세계시민의 의식과 국가에도 변하지 않는 가치관”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런 질서와 가치관이 지배하던 세상 속에 예수님이 산 위에서 백성들에게 설명하셨던 화목, 평화의 정체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팔복의 모든 뿌리, 일관된 원칙은 언약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 화평, 평화의 뿌리도 하나님 말씀인 구약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속죄를 예표하는 그림인데, 그중에서도 화목 제사 속에 거의 모든 메시지가 감춰져 있다. 레위기 22장을 보면 제물을 먹되 그 날에 먹고 이튿날까지 두지 말라고 되어 있다. 또 다른 장에선 이튿날까지는 먹을 수 있게 되어 있지만 공통으로 셋째 날까지는 먹으면 안 된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첫째 날, 둘째 날까지만 먹도록 했을까? 왜 셋째 날에는 먹지 못하도록 율법은 금하고 있는가? 이 화목제물에 드려질 제물의 조건은 무엇인가’ 하는 세 가지를 질문해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먼저, 제물의 원론적인 기초인 소를 놓고 보면, 어떻게 해야 이튿날까지 이 소 한 마리를 다 먹을 수 있을까? 화목 제물을 드리는 제사의 과정에서 왜 하나님께선 그 날에 먹을 것이라 하고 서원 제물이나 자원 제물일 경우에는 다음날까지 먹어도 된다고 한 것인가. 여기에 담긴 하나님의 속뜻을 이해해야 한다. 나눠서 함께 먹으라는 뜻”이라며 “하나님은 함께 일하시는 방식을 가장 좋아하신다. 아담에게도 돕는 배필을 만들어 주셨고,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도 ‘우리’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성부·성자·성령 삼위의 하나님이 함께하셨다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도 일할 때 두 명이 함께 한두 시간이면 할 일을 여럿을 모아서 대여섯 시간이 걸려서 한다. 시간 비용, 재정비용, 에너지를 생각하면 매우 비합리적이고 비경제적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걸 좋아하신다. 항상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게 정의고 선이다. 그만큼 하나님은 함께 가는 걸 너무 좋아하신다. 그래서 하루나 이틀 만에 먹으라는 말의 의미는 함께 그것을 먹으라는 깊은 하나님의 배려와 메시지가 감춰져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두 번째 질문인, 왜 셋째 날까지 먹어선 안되는가. 레위기 7장을 보면 화목제물의 고기를 함께 제일 먼저 좋아하는 사람, 가까운 사람에게 먼저 나누게 된다. 그런데 고기가 셋째 날까지 남지 않으려면 내가 원치 않는 관계에 있는 사람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이 제물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공여되고 나누어져야 한다. 그런데 고기가 남았다는 뜻은 싫어서 안 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성경에 그 제사는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 되어 있다. 드린 자에게도 예물답게 되지 못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된다”고 했다.
송 목사는 “마태복음 5장 21~23절을 보면 예배자가 예배 때가 되어서 제단 앞에 제물을 드리려는데 형제에게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이 생각났다. 원망은 윗사람보다 아랫사람이 강자보다 약자가 하게 되어 있다. 예물을 드리려다가 약자의 원망소리가 생각나거든 예물을 재단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평소에 나랑 불편했던 사람들, 원치 않았던 사람들과도 적어도 하나님 앞에, 제단에 제물을 드릴 때는, 예배를 드릴 때는 그 제물을 원치 않는 관계의 사람들과도 풀고 나누고 화목하라는 것이 이 제물이 갖는 의미이자 메시지다. 그런데 그런 관계없이 제물을 남겨두었다가 자기가 먹어버리는 것은 그 예물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 제사의 의도가 비틀어졌다는 것, 불편한 형제와 화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제사의 과정 하나하나에 이런 속 깊은 의미를 감추어 놓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태복음 18장 18절에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은 너희가 땅에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서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거다. 한국말에 적절한 표현으로 관계가 불편할 때 풀라고 말한다. 정확하게 같은 개념이다. 무엇이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원천적으로 설명하면 너희는 하늘에서부터 풀림을 얻은 복된 자이니 이 땅에서도 풀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화목과 용서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하냐면, 용서의 문제는 타인과의 문제가 아닌 결국 내 안의 문제이다. 땅에서 매는 사람도 나이고, 푸는 사람도 나이다. 매고 푸는 주체가 내 안에 있다. 나와의 싸움이지 원수와의 싸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D.L무디가 ‘세상 사람 100명 중에서 어쩌다 한 사람이 성경을 읽고 99명이 그리스도인을 읽는다’는 말을 했다. 대부분 사람이 성경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을 읽고 예수를 만난다“며 “한 주간 일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로 읽히는, 걸어 다니는 바이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